사랑한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말처럼 들린다.

 

갈라테이아 (Γαλάτεια / Gala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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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7 / [ 파마 알터 디트로이트 X 에스테이온 펠로 레이놀즈 ] ‘온점 두 개 타입’ 신청본

지정 문장 1. 물거품이 되고 싶었다.

2. 꼬리가 없는 인어공주가 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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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youtu.be/kNsycnTm9n8

  삶의 방향성을 잃은 파마에게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두 가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나는 타인의 불행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을 도저히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행이 거쳐 간 장소를 모색했다. 다크 투어리스트 - ‘어둠을 찾아가는 사람들’- 고통의 잔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터는 비로소 온전한 사색의 장이 되었다. 전쟁이, 질병이, 사고가 지나간 장소에서 그는 자신의 고통을 상대적으로 하잘 것 없고 빈약한 것으로 만들었다. 감정 또한 재난이라- 의지로서 완전히 감화할 수 없는 것. 그는 자신의 견딜 수 없음을 축소하기 위해 온갖 곳을 방랑해야만 했다. 한 장소가 줄 수 있는 합리성은 잔혹하리만치 한정적이었다. 

  마침내 그가 도래한 곳은 이름도 알 수 없는 해변이었다. 풍화되어 지독하리만치 거칠게 마모된 절벽숲, 그리고 유일하게 인공성을 간직하고 있는 버려진 낡은 등대. 절벽의 앞섶이 지붕 노릇을 하는 바람에, 등대 주변은 낮에도 새까만 어둠만이 부유했다. 검은 파도는 불규칙적으로 철벅거리는 소리를 냈고, 오랜 세월 관리되지 않았음이 명백해 보이는 등대 내부는 퀘퀘한 냄새가 났다. 

해변의 이름도, 분명 존재할 해당 장소의 지명도, 어느 지도에서도 나타나 있지 않고 물을 사람도 없어, 도저히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이에 동질감을 느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해 무가치한 것. 맹목적으로 모르는 것을 갈망하며 어쩌면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것. 그는 등대 내부에서 묵기 시작했다. 그 해변에서 그는 더 이상 불행을 비약해가며 사색하지 않아도 되었다. 해변은 외압 없이도 충분히 고립되어 있었다. 원인 없는 불행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불행과 치열히 다투는 것 자체를 하잘 것 없는 시도로 만들었다. 마침내 그는 죽음이 당위적으로 느껴졌다.

  두 번째는 이야기였다. 현존하는 것이 괴로운 그는 쓰는 행위에 집착했다. 사실 그는 세상을 제법 시니컬하게 바라보았다. 생존하는 최초의 의미가 함몰된 이후, 그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세상이 원망스러워 그는 이야기에 현혹되었다. 이야기라는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즉각적인 감정의 변혁을 일으켰다. 듣는 자체만으로도 재미가 있을 뿐더러, 일상과 그를 분리시켜 주었다. 이를 지속하기 그는 위해 보고 듣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메모했다. 진위성은 상관이 없었다. 결정하기 나름이었다. 불행한 이야기는 주로 진실로 치부하기로 했다- 방랑과 도피의 일부였다. 그러나 나머지는 어차피 허구를 구성하는 기반으로만 사용되었다.

  그가 작가가 된 것은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는 한 가지 주제만 던져 주어도 금새 하나의 이야기를 구상하여 완결해 낼 수 있었다. 쌓아온 막대한 데이터 자체가 도식화되어, 별 다른 창조적 능력 없이도 개연성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몇 개의 소설은 익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지은이의 이름이나 말을 남기는 것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만 행하는 일이기에 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대부분 명확한 불안 요소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쟁 고아, 지독히 이상적인 것-로맨스 따위의-을 갈망하여 결국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인물, 넘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 - 출신, 신분, 정체 등- 을 지닌 인물 따위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싸우다가 거대한 한계에 부딪혀, 결국 일정량의 성장을 이뤄내나 목표한 바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철저한 고증과 자세한 심리 묘사 덕에 세간에선 꽤나 호평을 받는 모양이었지만, 스스로는 참을 수 없이 저열했다. 그가 써 내는 작품들의 인물들은 단 한 가지를 해소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정작 그는 그가 무엇을 해소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탄생시킨 인물들에게 공감할 수도, 이입할 수도 없었다. 지독한 허구와 망상 그리고 비현실성 - 그러나 이것들은 자신의 생을 유지시키는 것. 걷어낼 수 없는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증오였다.

  글쓰기를 멈추면 현실에 당면해야만 했다. 끝 없는 공허감과 무력감. 그래서 그는 저주스러운 작품 집필에 매달렸으며, 철벅거리는 냉소적인 파도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한다니. 아, 그만, 

  그만 물거품이 되고 싶다. 갈라테이아.

  그에게도 유일하게 애정을 두는 작품이 있었다. 세상에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작품만은 수십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수백 번은 넘게 되뇌였다. <갈라테이아>, 그리스 신화 속 요정의 이름을 딴 그 소설은 ‘거품’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피그말리온 설화 각색에 안티 플롯. 줄거리란 없었고, 주인공 ‘데이’는 조각상이었다. 데이는 설명할 수 없는 연유로 사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방도가 없었기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잉태한 조각가 뿐이었고, 자연히 조각가를 성애하게 되었으나 표현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데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작품들의 인물과 현저한 차이점을 지닌 것이다. 잃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물거품이 되기만을 꿈꾸며, 언제까지나 조각가를 바라보며 사색한다. 그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이야기 없는 이야기. 존재만으로도 부질 없으나 그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는 인물. 무엇에 해방되고 싶은지조차 모르면서 해방을 갈망하고, 그 욕구만이 그를 존재하게 하는- 아, 자신과의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파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으나 아직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파마는 신분 자체가 의뭉스러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파마는 데이에게 너무 이입한 나머지, 언젠가는 그 소설을 적은 공책을 통째로 파도에 방생시켜 그를 해방시키려고도 했다. 그 계획은 파마의 이기심으로부터 저지되었다. 좋아할 수 있는 것이 그 뿐인 상황에서, 이를 놓아준다면 그도 삶을 마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여태간은 이가 흐렸다. 열망한다면 언젠가는 해소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믿었다. 그러나 요즘은 찬 파도의 음성이 달콤했다. 물거품이 되기를 욕망한다면, 들어서는 것으로 이룰 수 있었다. 죽음은 확고한 해방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얼마 뒤라면 그는 이 작품을 익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계기로 그 자신도. 

 

이를 깨닫자 그는 자신이 오래간 죽음을 갈망해 왔다고 착각하기 시작했으며, 이번에도 진위성은 중요치 않았다. 

 

  며칠 뒤 갈라테이아가 그에게 닥치지 않았더라면, 이번 계획이 무산될 연유는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라 확언한다. 

2

  그 날도 파마는 무효한 글을 쓰는 것으로 무상한 일상을 연명하고 있었다. 인어공주를 각색한 해당 소설은 결말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로맨스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한순간에 포기한 그녀를 당최 이해하기 힘들었다. 안데르센은 지독한 몽상가임에 틀림없다 -집필의 행위가 특히나 치욕스럽게 느껴지는 바람에, 결론내린 죽음에 대한 갈증이 자연히 극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를 달래기 위해 그는 해변가로 향했다.이따금 함께했던 <갈라테이아>는 동행시키지 않았다. 실은 이를 펼쳐 보지 않은지 꽤 오래 되었다. <갈라테이아>는 그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였다. 불온 서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등대의 문에서는 곩은 소리가 났다. 철체에 닿아 귀에 울리던 매서운 발걸음 소리는 모래사장에 당도하자 사그라들고 말았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공간의 낭비인 것만 같은 해변은 무척 걸어도 그 광경이 거의 변하지 않아, 시계를 챙겨오지 않으면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무를 걸어내는 것. 꼭 죽음을 체험하는 것과도 유사하게 느껴졌다. 만일 그가 새 작품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더라면, 흑빛 바닷가가 배경으로 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해변이 준비한 것은 완전한 무효성이 아니었다. 

  그는 길목에서 허여멀건하고 말끔한, 어떠한 온전한 인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온전한 인영이란 표현을 고수한 이유는, 그림자가 드리운 해변가에서도 그의 피부에서 광채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부자연스러울만큼 또렷하게 제 시야에 잡힌 까닭이다. 도저히 연계성 없는 등장에 그는 짐짓 신기루를 보고 있는 것인가, 고민했으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상은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가 인영 앞에 정확히 도달했을 때, 정체불명의 인물은 새파랗고 투명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보았다. 

 

  대양을 연상시키는 동공이었다. 맑았으며, 무엇이든 투영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비추는 대로 수용할 것 같았다. 파마는 일순 바다의 색은 원래 푸른빛을 띈다는 점을 아주 오래간만에 기억해 냈다.

 

  푸른 빛 나는 눈동자의 인물은 온화하게 웃는 얼굴이었는데, 이는 진정으로 평안하거나 기쁨을 느껴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과 때문에 그 표정만을 지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파마가 느낀 기묘함은 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력한 기시감에 휘어잡혔다. 도저히 불가능한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지나치게 허무맹랑하고 허구적인 하나의 가능성 - 

 

‘시력이 들어있는 원리조차 알 수 없는 사파이어를 닮은 푸른 눈동자. 노련한 조각가가 제 자존심을 걸고 발악하여 세공해낸 산물은 과연 그 효용을 했다. 조각된 두 눈동자 앞에서, 조각가는 이따금 멈춰 서 이를 어루만지며 신이 데이에게 시야를 선물하기를 고대했다. 그 눈이 한 대상만을 올곧게 응시한다면, 해당자는 평생 축복받았음을 깨닫고 누리리라.’

 

  _ 익숙한 문장. 제 자신이 쓰고 몇 번이나 읽어냈던. 그것은 데이에 관한 묘사였다. 야생성이 낭자한 풍경에서 오려 붙여넣은 것처럼 잘 정돈되고 윤기 나는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어지게 두며, 푸른 빛 동공으로 온전히 파마를 담아내고 있는 그는 그가 상상했던 데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피그말리온이 아니다. 이는 저명한 사실이다. 허나 눈 앞의 이 자는 틀림없이 데이였다. 이에 대한 증명으로 무심결에 데이, 하고 작게 발음하자 데이의 새하얀 피부에 붉은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많은 작가들은 작품을 쓸 때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들과 만남을 갖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이는 작가가 그 대상을 온전히 장악하여 빈틈없이 설계해내기 때문이리라. 파마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마다, ‘나는 당신이 그린 데이가 맞아요.’ 하고 발언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했다.

 

“데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백기를 든 셈이다. 데이는 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건 저도 몰라요. …그렇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말도 안 돼.”

 

  이렇게 허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 발생할 거였으면, 그 시기가 더 일렀어야 한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최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파마에게는 이 막대한 황당스러운 상황이, 오히려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현실적인 고려로 반기를 들고는 있었으나, 이미 어디선가 겪은 것처럼 익숙하게 데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 같은 몰아치는 파도 소리가 든든해서, 쏴아아, 그는 빠르게 동화되고 있었다.

 

“나도 알아요. …게다가 내가 실은 소설의 인물에 지나지 않고, 당신이 나를 만들어 낸 사람이라는 것도 알죠. …그럼 나를 만들어 낸 사연들은 글에 지나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 … 전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생해요.”

 

“…데이.”

 

“네. 작가님은 이름이…”

 

“…”

 

“저자명도 쓰여 있지 않더라고요.”

 

“…그냥 파마라고 불러.”

 

“페메?”

 

  파마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찌 해야 좋을 지 대책이 안 섰다. 데이의 존재가 일시적인 이벤트거나 환상일지, 아니면 영영 지속될 사항인지도 감이 안 잡혔다. 후자라면 죽음에 당면한 그는 데이를 오래간 부양해 줄 수 없었다. 그냥, 못 본 체 하고 지나칠까. 그러나 아무리 수 없이 많은 진실을 허구로 변혁시킨 그라 한들,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일의 숨을 죽일 수 있을지는 우려스러웠다. 게다가, 데이란 그가 이 권태한 삶에서 단일적으로 마음을 기울여 온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비록 얼마 전까지는 실체가 없었다 한들 말이다. 

 

“…페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책 속에 갇혀 있을 때에는 오로지 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답답했는데… 정말 답답했는데. 이렇게 말도 하고,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제 마음도 모르고 데이의 미성은 신이 난 듯 재잘거렸다. 데이가 원작처럼 자신의 요지부동한 운명을 원망하며 물거품이 되기를 갈망했더라면, 조금은 죄책감 없이 돌아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이렇게까지 나오니, 파마도 그를 더 이상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해변가에 가만 내버려 둔다면, 데이는 원작처럼 막연한 상실감에 빠져 마침내 바다로 성큼성큼 들어설 테니. 살아가고자 하는 능동적인 데이의 모습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데이가 아니었다. 작가란 창조주는 될 수 있어도 인물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파마는 손짓했다. 가자, 내가 원래 지내는 곳이 있으니까.

3

  이따금 데이는 이전에 이 등대에도 있었을 등대지기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는 파마만큼은 아니더라도 고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언정 마음 속에 켕기는 사연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이 해변은 그를 무척이나 증폭시켜주는 장소였으니까. 어쩌면 그 고독했던 등대지기도 투신하여 검은 바다에 잠겨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가 생각하기로 이 등대에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수용 인원을 넘긴 등대는 곧바로 데이의 상냥함이 닿는 곳마다 때처럼 지눅히 붙어 있던 절망을 벗겨냈다. 데이는 원작과 동일하게 자신의 창조주를 사랑했다. 축성의 효력을 지닌 눈동자는 파마만을 담고 있었다. 원작에서 조각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게 한스러웠던 것인지, 신실한 종교의 성인을 모시듯 파마를 예우했으며 기품 있는 몸가짐에선 헌신의 투지가 엿보였다. 사실 파마의 입장에서도 이런 데이의 태도는 흡족스러웠다. 유일하게 자신과 맞닿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전무후무한 사람(그렇다, 이제는 정말 사람이다.). 

 

  그러나 파마는 원체가 불행을 추종하는 기질이 있었다. 데이의 흠결 없는 태도에 오히려 그는 불안함을 느꼈다. 공포감의 원인은 그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원작과는 점점 다른 자체적인 데이가 되어가는 데에 있었다. 그가 사랑한 <갈라테이아>의 데이, 그러니까 자신이 아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주체성을 지니고 자신을 통해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미칠듯한 괴리감이 들었다. <갈라테이아>는 충족되지 않는 데이의 욕망이 주제이자 결말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있는, 충만함을 만끽하고 있는 데이. 그런 데이란 자신과 연결지을 수 있는 고리가 남아 있는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데이가 실존하는 이상 자신의 손을 벗어난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탄생시킨 인물이 숨을 얻어 행복을 열망하고 다가서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되려 거대한 상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있을 것인가? 데이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자신에게 일차적인 혐오감이 들었다. 당장 자신이 죽는 것도 안 됐다. 가장 아끼던 인물에게 이기심 때문에 역경을 제공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데이를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그에게 아주 거대한 미션으로 다가왔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라.

 

  생에 대한 열망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떻게 흘러간들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면, 그는 또 다시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워야만 할 것이다. 다크 투어리스트 행세도, 소설을 통해 현실로 도피하는 것도 안 됐다. 이것들은 결국 불행을 부추겨 달래는 일시적 의례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근본적인 행복이라는 것 - 이는 그에게 너무 멀고도 괴리감 있게 느껴져서. 이제 와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할까. 

  “페메, 왜 또 심란한 표정이에요?”

  등대 바닥의 먼지를 헝겊으로 닦아내던 데이가 상냥하게 물었다. 데이는 간단한 청소를 즐겼다. 몹시 서툴렀지만, 멀끔한 공간에 있는 파마를 보는 것이 내킨다고 했다. 어설프게 요리를 하는 것도, 페메의 잔가지 같은 글을 읽는 것도, 이리저리 배치를 옮기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는 동안 이계에서 온 것 같이 어색했던 외관의 윤기와 멀끔함, 고결함은 사그러들기 시작했으나, 얼룩진 데이의 모습은 오히려 상쾌하고 후련해 보였다.

“통 웃질 않는 것 같아서요.”

“…그럴 일이 없잖아.”

“너무해요. 난 하루 종일 이렇게 애쓰는데.”

  그래, 그러니까 그 사실이 자신의 심란함을 더 가중시킨단 말이다. 그래도 파마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뻣뻣하게 근육이 경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갈라테이아> 속 데이에게 영구한 시련을 준 것에 대한 작가로서의 죄책감, 그리고 자신만을 위하는 대양의 눈동자. 파마는 데이에게 절대로 모질게 굴 수 없었다. 결국 이 웃음조차 하나의 선언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을지언정 행복을 추종하기로 시도해보겠다는. 

 

  선언을 연속하기 위해 그는 <갈라테이아>를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펼치는 공책이 낯설었는데, 자세히 뜯어 보자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미 결말이 난 <갈라테이아>에 한 챕터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이에는 데이가 생명을 얻었을 뿐더러, 소설 밖으로 나서 창조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근래의 일에 대한 요약이었다. 

 

  사실 그가 <갈라테이아>를 꺼내 든 이유는 후반부의 내용을 수정해주기 위함이었다. 원본의 <갈라테이아>를 더 이상 도피 삼지 않기 위하여, 또 변화된 데이의 모습을 반영해주기 위하여, 데이가 결국은 말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어 조각가와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적 이야기를 완성시키려 했다. 허나 이제 이 소설은 더 이상 허구의 것이 아니었다. 공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파마를 데이는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에게도 설명해주리라 기대하는 듯한 눈초리로.

 

  파마는 실소를 터뜨렸다. 하… 하하. 적막한 등대에 웃음소리가 작게 울리자 데이는 어찌 됐든 웃는 것을 보니 반가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마는 펜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다짐이 성사되었을 것을 반영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최선의 엔딩을 고안하여 몇 줄 더 적었다.

 

‘작가 역시 데이를 사랑하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고백했다. 데이는 기뻐했다.’

 

  평소의 문체와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단조로운 문장. 끼어 있는 것이 민폐로 여겨질 정도로 평이한.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마침내 데이를 응시했다. 그 순간, 또 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데이를 본 순간, 갑자기 마음이 들뜨며 상기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숙고해왔던 감정들을 일순 직시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헌신하는 데이를 그려왔으며, 그에게 의존하고, 또 서로에게 나은 결말을 마련하고 싶다는, 처음으로 글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리고 하나뿐인 독자로서 글을 읽어낼 때마다 억눌러왔던 욕망. 조각가는 자기투영에 지나지 않았었지. 그래서 은연중에 싫어하곤 했는데 - 아, 잠재되어 있던 욕망은 얼마나 지독하고 커다란 것이었던가? 한 순간 발화된 애심이 타오르는 탓에 데이를 제대로 살피는 것 조차 힘들었다. 귀 끝이 조금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며, 파도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고, 대신 가장 은밀했던 심장소리가 옅게 두근거리는 것을 알았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날 사랑해, 데이?”

  해당 질문은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를 고려한 겁쟁이들이나 할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데이는 그가 무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멀겋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고, 하고 싶은 게 없어요.”

 

“…”

 

“…왜 그래요 페메? 알고 있었지 않아요?”

  결국 파마도 고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데이. 나 역시 널 사랑하는 것 같다고.”

  사랑한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말처럼 들린다.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의 삶은 완전한 전환을 맞이해야만 한다.

4

 

  그러나 이 사랑은 너무 인위적인 데가 있다. 사랑하기 위해 탄생시킨 인물, 사랑을 깨닫기 위해 적은 문장, 사랑의 확인을 위해 내뱉은 고백. 무엇 하나 자연스러운 구석이 없어서, 파마는 여전히 안정적인 행복에 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우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 <갈라테이아>에는 주술같은 것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문장을 적자마자 갑작스레 묵어왔던 감정을 직결적으로 토해낼 계기가 없지 않는가.

 

  그는 즉시 실험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데이가 곤히 잠들었을 때, 공책을 꺼내 만년필 촉에 잉크를 묻히고 - 그는 자필로 적을 때에는 오로지 만년필에 잉크만을 고수했다. - 몇 줄을 더 적었다. 

 

‘그 날 데이는 피로하여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일어나 놀라며 얼마나 잤는지 가늠했다.’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다만 이런 것은 사소한 우연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의 검증을 더 거쳤다. 오늘 데이는 청소를 하다 말고 꽃을 심어보자고 제의한다, 해변가 산책을 가자고 점심 먹으며 말한다, 해변가에서 넘어질 뻔한다…

 

  이 모든 일들이 정확히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우연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실험을 마치고, 파마는 그의 가설이 정확했음을 깨달았다. 작품과 완전히 독립될 줄 알았던 데이는 결국 여전히 그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주체성을 가진 한 객체인 줄 알았건만, 여전히 등장인물이고 그를 위해 마련된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을 깨닫고 고해버린 이상, 그는 이 사랑을 지켜내고 싶었다. 삶의 열망을 부추기지 않았는가.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갈라테이아>를 더 이상 꺼내 들지 않기로 했다. 그는 데이가 독립된 자아로 거듭나 제대로 된 행복을 향유하길 바랐지, 그가 마련한 인과에 휘둘리게 할 생각이 없었다. 사랑은 타자의 순전무구한 애정을 받아내기를 열망하는 것이지, 그의 조종판을 잡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므로. 

 

  공책을 봉하고 며칠간의 시간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결심히 서자 국면의 전환에 적응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으며, 그는 데이의 친절과 배려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 역시 데이를 위해 해 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함께 해변가를 거닐 때면 어느새 두사람은 손을 맞잡기도 했다. 파도 소리가 거세지는 밤에는 좁은 등대 안에서 몸을 기대고 서로의 숨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파마가 홀로 고민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리모콘을 발로 으깬데도 티브이가 유기체가 될 수 없듯, 결국 데이의 애정도 자신을 계기로 생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데이에게는 그 사실을 감추기로 했지만 - 자신을 매너리즘에 빠지게 한 이 공포스러운 사실을 당사자가 당면하게 되면, 어떠한 충격을 받을 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진실하지 못한 자신에게 느끼는 죄책감과 진솔하게 사랑받고자 하는 열망은 그저 메어 두어야만 했고, 신생된 애욕은 날이 갈수록 커지는 탓에 이에 자신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데이에게 이가 들키기를 바랐다. 그래서 데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떠나가지 않겠다고 확언해주길 바랐다. 

  계기는 생각보다도 빠르게 찾아왔다. 홀로 마무리할 글에 열중한 나머지 데이가 산책을 가 오래간 돌아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 흘러간 이후였다. 그는 패닉에 빠졌고, 잘 켜지지 않는 등대의 불을 환하게 비춰 아래의 해변가를 내려보았지만 데이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등대는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곧 꺼질 것이라는 걸 열심히 암시하고 있었다. 계단참 입구까지 서둘러 걸음을 옮긴 파마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들어와 충동적으로 공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무정한 얼굴로 

 

‘데이가 당장 복귀했다.’ 

 

라고 적었다. 하지만 몇 분을 기다려도 데이가 돌아오지 않자, 패닉했다. 왜? 금방 나타나지 않는 거야? 안 좋은 상상만 지속하다 보면, 이를 현실과 혼동하게 된다. 파마는 데이가 당장 복귀한다는 문장을 쉼 없이 반복하여 적기 시작했다. 이 자체에 정신이 팔려, 데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조차 알아채지 못 했다.

 

  뭘 하는 거냐고, 데이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파마는 일그러진 얼굴로 공책과 펜을 숨길 생각도 못한 채 망연자실히 그를 바라보았다. 힘이 빠진 새를 틈 타 데이가 공책을 살피기 위해 무릎을 구부렸고,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공책을 주워들고 읽기 시작했다. 데이의 이해력은 탁월한 편이었다. 금새 상황파악을 마친 데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괴로운 침묵이 연속되는 동안, 누구도 쉬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파마가 무엇인가 말하려 입을 열려는 찰나, 데이가 선수를 쳤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등장인물인 거군요?”

 

“…영영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 데이, 그리고”

 

“…솔직히 전혀 예상 못 했지만.”

 

너무 신이 나 있었나 보죠, 라고 나직히 말하는 데이의 미성은 떨리고 있었다. 파마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선뜻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뒤 겨우 이렇게 물었다.

“…여전히 날 사랑해?”

“…네.”

“…”

“당연하죠, 난 그것밖에 못 하니까요. …그렇게 정해진 거겠죠, 그쵸?”

 

  처음으로 맞이한 자유에 지독히 기뻐했던 데이는 한순간에 이가 허구라는 것을 알고 절망하고 있었다. 파마는 절박했다. 이미 살기로 결심했는데, 향유하지 않았던 행복을 취했는데. 데이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 듯 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게. 결국 파마는 자신의 욕심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바라던 것. 욕심이자 이기심, 그러나 데이가 이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들의 사랑은 최소한 당장은 긍정적으로 지켜질 것이다.

 

“그 공책, 이제 책상 위에 두고 둘 다 쓰지 말자. 난 마음 가는 대로 너와 있을게. 그럼 괜찮아.”

 

“…페메.”

 

  안다. 방금의 말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데이도 부디 그래달라는 요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지만.

 

“정말 이 공책 없이도 우리가 이대로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데이는 반문했다. 파마는 명확히 답을 할 수가 없다. 거짓말은 그의 적성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돼.”

 

“… 그럼, 내가 이래도 되겠네요?”

  데이는 탁자 위에서 치우쳐 서 있는 잉크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잉크를 공책에 주륵 하고 부어버렸다. 파도만큼이나 시꺼멓게 물들어가는 공책은 피로 젖은 것만 같았고, 파마가 슬쩍 바라본 데이는 몹시 서글퍼 보였다. 

5

 

[*브금 전환 필수] https://youtu.be/z5USK1y2898

  하물며 캘리포니아에 있는 나비 하나의 날갯짓도 정반대편에 위치한 사막의 흙폭풍을 불러온다는데, 공책 전체에 잉크를 눅진히 들러붙게 한 데이의 행동이 아무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음 순간 데이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웅크렸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 곳을 부여잡지도 못하는 것을 보아 전신에 통증이 느껴지는 듯 했다. 

 

  파마는 황급히 그의 곁에 앉아 어떻게든 수를 써 보려고 했으나, 외마디 비명은 더욱 처량해졌다. 급박한 와중에 파마는 또 공책을 펼쳤다. 공책은 넘겨 둔 몇 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뒷표지 장에, 파마는 ‘데이는 멀쩡해졌다.’ 라고 적었다. 급격히 나아지는 듯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파마는 조금 안도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데이가 마침내 몸을 일으켜 앉아 벽에 기대고, 다시 입을 열어 한 마디를 할 때 까지 말이다.

“…누구…”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데이의 말은 그의 존재감만큼이나 선명하고 또렷했다.

“…죄송한데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데이는 자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이름도, 장소도, 그리고 출신도 기억하지 못 했다. 

….아니.

 … 어쩌면 이대로면 됐다. 공책을 유지하는 것보다, 이렇게 잉크를 엎어 버린 것으로 모든 것을 초기화 시켜 버린다면, 데이는… 고민이나 갈증 없이 제 나름대로의 삶을 주축이 되어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은? 파마는 울컥하는 감정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은 긴 시간 데이만을 바라보고 이입해 오며 이해받는 기분을 받았다. 비로소 데이가 자신 앞에 생명을 두르고 나타났을 때, 당혹감은 생에 관한 열망으로 변환되었으며 그는 데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 꾸게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이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 부리고 있는 것은 멍청한 집착에 지나지 않는가? 자신을 온전히 자신으로서 유지시켜 줄 수 있는 매개이자 열망하는 것. 달이 태양 없이는 빛을 반사해 제 역할을 해 낼 수 없듯이, 파마는 데이를 광원 삼아 여태 살아 왔다. 살아 왔는데. 사랑해 왔는데. 살아, 그리고 사랑해 왔는데. 

 

  아… 견딜 수가 없다. 데이의 온전한 선택이었어. 존중해야 해. 아니야.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이제는 죽어버릴 수도, 불행의 늪으로 도망칠 수 없는 나는 어떡해야 하는데. 내 삶은 골밀도가 낮아진 관절처럼 제 기능을 못하고 부서져야 하고, 산산조각이 나도 이를 온전히 느끼며 어떻게든 행복을 갈망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여야 하나?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 그리도 큰 바람이었나? 혹은 생에 대한 결심을 번복한 것이 죄였나. 기억을 앗아가 기회를 영영 앗는 것으로 앙갚음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업보였나? 아, 파마는 다시 공책을 꺼낸다. 아, 다시 펜을 쥐고, 아, 잉크를 찍는다. 손이 점점 빨라진다. 몰아쉬는 데이의 숨소리가 그의 손놀림을 재촉한다. 그는, 적는다, 꾸역꾸역,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을, 그러나 알아서 의미를 갖길 바라며, 너는 나를, 사랑해, 너는, 날 사랑해 데이, 너무 사랑하는데, 잊어버린 것 뿐이야. 난, 너를 만들었고, 너는 나를, 만들었어, 너는 내가 너에게 생을 불어넣었다지만, 나야말로, 너로서, 너를 통해, 살아갈 수 있었어, 이 생을, 욕망하게 만들었고, 욕심내게 했고, 안타깝게 했고, 바라보게 했고, 기대하게 했고, 미래를 그리게 만들었어, 물거품이, 다,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는데, 

너는, 

 

하여금 나를,

 

사랑, 하게, 만들었어.

  잉크가 종이에 스민다.

 

  데이가 파마를 바라본다.

 

  그는 다시 나직히 그를 부른다.

  “페메.” 하고 부른다. 여전히 비어 있는 저자명. 어떤 기억은 연동된 걸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시스템의 산물이 아니고서야 불가한가. 너에게 자체적인 의지란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럼에도 너는 나를 사랑할까? 나는, 나야말로,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나는…

  “페메, 울지 마요.”

  “…”

  “웃으라고 했잖아요. 정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도저히 이제는 피할 수가 없는 푸른 눈동자를 다시금 응시한다.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새까만 인영이 푸른 눈동자에 융화되어 푸른 기가 서린다. 입술을 짓씹는다. 숨을 들이킨다. 달싹인다. 호흡한다. 어깨가 흔들린다. 겨우 묻는다.

  “… 안 되나 봐.”

  “…”

  “네가, …여기서 빠져나온 한, 평생 이거대로만 살게 되는 건가 봐.”

  “…”

  “어떡하지? 데이.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데이는 그의 어깨에 왼손을 올린다. 그리곤 힘 없이 토닥이기 시작한다. 온기가 맞닿는 손이 따스하다. 누가 데이를 등장인물이라 치부할 수 있겠어. 어떠한 인류도 자신에게 이런 온화를 선보인 적이 없었다. 파마는… 

 

  “…그러지 마요, 페메. 어차피 페메를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난…”

  “…”

  “페메가 그러니까 나도 마음이 무너질 것 같단 말이에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단 말이에요.”

 

  데이의 목소리가 또 다시 떨려온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면, 파마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공책을 집어든다. 어느새 손에는 검은 잉크가 마구잡이로 흘러내리고 있다… 

 

  “… 난 괜찮아요. 페메만 좋다면… 그냥, 이런 식이라도… 페메랑 같이 있을게요.”

  “…”

  “…안 돼요?”

  “… 너랑 있어도, 난 끊임없이 의심할 걸. ”

  “… 날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잖아요. 네?”

 

  조르는 어조이지만, 분명 달래는 것처럼 느껴진다. 페메, 페메. 하고 간곡히 들려 오는 데이의 부드러운 음성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온다. 이것은 안 돼, 삶의 조종대를 송두리째 잡고 나만을 위해서 데이의 숨을 쥐는 것은… 아, 사랑에도 명쾌한 정답이 있었더라면은. 이기성과 이타성이란 어디까지가 한계이고 그 유대는 어디에서 귀결되는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그건 안 돼. 데이…”

 

  이것은 파마가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오기. 조금만 더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혹은 데이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낸다면 그는 결국 욕심 때문에라도 그를 영영 곁에 소유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의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대며 평생 그를 의심하며, 순결무고하게 그를 사랑할 수 있었던 과거를 집약적으로 회상하며, 찬탄스러웠고 순결했던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여생을 살아가고, 행복의 이름을 더럽힐 것이다. 

  나는 그런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봐. 지독히도 불안할 때에야만, 그래서 걱정이 끊이지 않을 때에야만, 긴장감이 들어 미칠 때에야만, 그래야 익숙하고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기분이 들어. 후련함? 모든 것이 좌절된 이후에 오는 후련함이 진정한 후련함인가? 이것이 후련함의 산물이라면, 아 나는 자유를 주었지만 다시 구속되고 싶어라. 그는 이도 저도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데이. 너에게는…”

  스스로가 들어도 거칠하게 상해 잠긴 목소리. 그렇게 파마는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증오해 왔던 수많은 자신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처럼, 한가지 욕망에 휘둘려 부질 없는 노력을 하고, 끔찍한 선택을 합리성을 내세워 이행시킨다.

“내가, 자유를 줄게.”

 

 그만 물거품이 되고 싶다. 갈라테이아.

  

6

[*브금 전환 필수] https://youtu.be/0AwU6lVxS3U

  최초로 해변가에 도착했을 때가 떠오른다.

 거친 파도와 성마른 암벽을 보며, 이 곳이 제게 적절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를 복기시켜 주는 것은 오늘의 파도이다. 지지 않겠다는 듯 몸집을 크게 불리곤, 항해하는 뱃사람을 잡아먹을 기세로 폭풍 같은 소리를 내며… 검은 파도는 몰아친다.

  대양 본연의 빛깔을 상기시켜 주었던 세례자는 자신과 동행한다. 파마와 데이의 발걸음이 모래에 나란히 찍힌다. 파마의 손은 검은 잉크로 잔뜩 더럽혀져 있고, 데이의 셔츠에도 일부가 튀었다.

 발걸음은 전혀 조급하지 않다. 이 산책은 마지막이 되겠지.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순례 - 손에 쥐인 것은 성경이 아닌 <갈라테이아>, 가장 치명적이고 교활했으며 숭고한 불온 서적. 

  바닷바람이 쇳소리를 내며 그들 사이를 오가고, 둘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하며, 쇳소리가 나는 바람이 이 사이를 몇번이고 지나치며, 마침내 파마는 데이의 손을 움키고. 검은 잉크는 유린하듯 방울로 분할되어 꼭 전도되듯 데이의 손가락에 스미고. 아, 잉크의 감촉이 꼭 타오르는 것처럼 뜨겁고 들큰하게 느껴진다면 이 역시 주술의 일부일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파마가 멈춰 서자, 데이도 우뚝 머무른다. 파마는 데이의 얼굴을 가만 응시한다. 데이 역시 파마를 바라본다. 서로의 형상이 완전하게 수용된다. 평생을, 이런 것을 욕망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 부질 없는 가정이여 - 그러나 허구는 오래간 파마의 삶을 영속시켜 주었다. 결국 허구성의 보호만을 받아온 파마는, 현실의 비참함에 대항하기로 했다. 그는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데이의 손을 쥐고 있던 팔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데이 역시, 나름대로 꼭 힘을 주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연결 - 완전한 연계요 수용을 체험한다. 

둘은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파도를 향하여.

  한 걸음, 

인어공주는 목소리가 있었더라면 물거품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두 걸음,

내 소설의 인물들은 다른 결말을 가질 수도 있었을까?

세 걸음, 

손에는 힘을 더 세게 주어야지. 파도가 험난하니.

네 걸음,

생으로서 지속 될 수 없는 유대라면,

다섯 걸음, 

               손을 맞잡는 것이야말로 

                     여섯 걸음 ,

일곱 걸음, 

아, 네 손바닥 만큼 따뜻한 건 어디에도 없을 거야. 

여덟, 

쏴아아, 

싸아, 

아홉, 

……. 쏴아아, 

철벅… 

철벅.

쏴아아…

ㅡ

[*브금 전환 필수]

https://youtu.be/0wEZX1o6cz4

ㅡ

  고독한 등대지기의 죽음을 목도한 자 없듯, 그 둘의 결말은 누구도 알아주지 못 하겠지만 - 

  

수심이 막 파마의 가슴께까지 차오를 무렵, 데이가 왈칵 그를 껴안았다. 

파도가 매우 시렸으나, 그 열감은 전신에 달라붙어선…

   왼 손에 쥐었던 <갈라테이아>는 파도결에 따라 흩

어.       지,           고.

그리고 어느 순간 파마는 자신의 품에 있던 데이가 어디론가 휩쓸렸음을 느꼈으며, 

아마도 그와 더 멀찍한 곳으로 휩쓸렸다. 

파도는 그들의 육신을 

통째로 삼켜 버렸으며,

  그의 손에 남아있던 마지막 잉크 자국까지 벗겨질 때 쯤…

  갑자기, 수면 위로 누군가의 머리가 불쑥 튀어올랐다. 그리곤 반사적으로 큰 숨을 들이쉬었다.

7

• 닫으며

지은이의 말  이 책은 출간 예정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쓰인 글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위해 존재했고, 나는 이를 통해 살아왔습니다.    나는 데이를 사랑했습니다. 이를  믿지 못한다면, 그를 붙잡은 채로 물거품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초고와 그는 익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이는 나의 사랑을 갈라테이아로 환산시키지 말라는 계시인줄 압니다.    나는 그를 기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출간된 책은 아무나의 손에 집혀 읽히게 될 것입니다만, 제가 갖고 있는 다시 쓴 원고와 다름 없는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데이를 자유로이 해 줄 것이고, 내가 데이를 무고하게 사랑했다는 것을 입증해 줄 것입니다.   인어공주는 꼬리가 있을 때 가장 자유로이 헤엄쳤습니다. 목소리와 꼬리를 잃은 그녀는 지상에서 아무런 기세도 펼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다시 바다로 뛰어들어야만 했습니다. 난 마치 꼬리가 없는 인어공주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두를 잃어도, 버틸 수 있는 한까지 존재할 생각입니다. 내 기억을 보존하는 것으로 데이의 존재를 입증하겠습니다. 데이는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했습니다. 정말 사랑했습니다.    데이가 그리워 참을 수 없어지면, 등대의 불을 끄러 다시 방문해야겠습니다.

-끝-

. 이미지는 저작권이 없는 것으로만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