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모든 이해는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지인 요청으로 작업한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장르의 오마카세 커미션 2입니다.

원작에 근친, 매춘, 강간, NTR, 자해, SM 플레이 등이 등장해, 작업물에도 해당 요소가 직, 간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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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

 

그 눈동자만 아니었더라도, 팬지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알량한 양심이나 보편적인 윤리 의식에 구애받지 않기로 결정한 저에게, 수상한 소문을 어깨에 진 채로 남아관에 쫓겨 온후배 녀석은 굴러 온 떡이나 다름 없었다. 곱상한 생김새며,  저를 쉽게 뿌리치지 않는 태생적인 순종성, 헐거운 의지로 몇 번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던 녀석의 습성을 기억한다. 단 하나, '그 이안'의 양동생이라는 것이 못내 걸렸지만, 그는 제르미의 뒤치닥거리 할 마음이 전혀 없다고 했으니 거칠 것도 없었다. 생존과 싸우는 것은 먹이사슬의 바닥에 놓인 소동물만이 아니다. 맹수 입장에선 무방비한 소동물을 서둘러 채 가는 것이 급한 것이다.

제르미가 묵고 있는 창고에 들러, 약을 같이 하자며 살살 꼬여내는 것쯤은 손 안대고 코를 푸는 것처럼 쉬웠다. 조금의 경계심으로 거절할 법도 한데, 벌벌 떠는 손으로 연거푸 알았다며 하며 약을 달라고 하는 꼴이 우습다. 침대 옆에 털썩 앉아 어깨에 손을 올리고, 슬슬 고개를 가까이 하니 이제야 어깨가 들썩인다. 이 미묘한 거부 반응마저 가소롭다. 등에는 헐거운 자취가 남발하는 자식이, 아하하, 뭐 이리 무겁게 굴어?

 

어쩌면 오늘 팬지는 잠자는 남창의 콧털을 제대로 밟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으로 하여금 한 남성이 미래를 개척하고 활주하도록 돕는 것이다! 제르미의 가냘프고 흰 손이며 순박하고 가련한 눈이며 뽀오얀 피부 같은 것, 오, 굳게 닫은 고집스런 입매마저 그를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거늘, 녀석은 비굴할 정도로 억압되어 있다. 싫...어! 목에서 긁힌 듯 욱여져 나오는 목소리가 이를 반증한다. 어린 아이를 달래듯 살살, 말을 잇는다. 야,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게다가 더 기분 좋은 걸 하면, 너 같은 자식도 설설 길 정도로 좋아 죽을걸. 팬지는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밀쳐 침대에 눕힌다.

"베이비, 잘 들어. 약을 받고 싶으면 나도 받는 게 있어야지"
"이런 식이면... 이런 식이면 별로야. 싫어!"
"웃기고 있네. 이거 안 갖고 싶어?"

손에 들고 있는 약 봉투를 허접하게 흔들어 보인다. 제르미의 눈동자가 닿는 것이, 집요해서 귀엽다. 그래, 더 튕기지 말라구. 반항하면 재미 없으니까. 자식, 하필이면 또 창고에 살 게 뭐람. 이곳에는 뭐든 있다! 심지어 시설 보수에 쓰려고 인부가 둔 듯한 밧줄까지. 잠깐, 잠깐, 정말 싫어. 없던 걸로 해. 제르미의 잇속에서 말들이 터져 나오지만, 아, 작고 순한 손의 완력은 유약하고 또 간지러울 뿐이다!ㅡ 후후, 웃으며 별 어려움 없이 제르미를 그의 침대 양쪽에 묶는다. 몇 번의 접촉이 오간 탓에 제르미의 상의는 이미 반 쯤 풀어헤쳐 진 상태다. 일단 한 번 묶이자, 제르미는 숨을 쌕쌕이며 팬지를 노려볼 뿐이다. 팬지는, ㅡ 원체 풀려 있던 단추가 두 개, 앞으로 단추 네 개만 더 풀어내면 벌거벗은 상체로 꼼짝 없이 덫에 든 제르미를 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일이 벌어졌다. 제르미가 심적으로 유약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단추 한 개, 버둥임이 완전히 멎었고,

단추 두 개, 얼굴이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려 악악거리는 비명만 내지르기 시작했으며,

단추 세 개, 입에 거의 개거품을 물고 온 몸이 축 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단추에 손을 대는 순간,

 

번쩍! 아, 그 눈동자!

 

번

쩍

이

는

 

그

 

눈

동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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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모딘에서 알아주는 망나니로, 온갖 곳에서 온갖 감정의 범람을 목격해왔다 자부해오던 팬지였으나 이런 눈은 처음이었다. 정확하게 자신을 쏘는 그것에서는 원인 명확한 증오와 반감이 가득이다. 작은 꿈틀댐도 없는 신체와 반대되는 명백한 거절. 이를 마주한 순간, 팬지는 아주 오래간만에 풀어 헤치듯 한 교복 셔츠가 부끄러워졌으며, 마이를 올바르게 차려 입고 싶었고, 머리를 곧게 손질해 제르미, 저 자식을 건든 자는 내가 아니야, 하고 외칠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모딘 망나니의 교복은 이미 잔뜩 구겨져 즉석에서 손 쓸 도리가 전혀 없었고, 그의 몸에서 나는 악취도 변함 없었으며, 손에는 단정히 당겨 찰 넥타이 대신 남은 밧줄이 들려 있었다. 제르미는 거미줄에 둘둘 메인 채 침묵으로 그를 완전히 타자화하고 있었다. 그는 제르미를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생각했으나, 묶어 두니 돌아온 것은 오히려 철저한 외면이었다. 제르미의 의식이 불분명해지는 듯, 눈동자의 빛은 점차 꺼져가고 있었으나, 팬지만은 움찔했다.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그런 눈빛을 마주하고 나니 쉬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중압감을 이기는 유일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당장 그를 풀어준 뒤 제대로 눕혀 상태를 살피는 것이 상식인의 선택이겠지만 팬지는 그런 수준까지는 못 되었다. 녀석을 둘러싼 수상한 가설들 중 몇 가지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 그는 살며시 제르미의 목섶에 간신히 달랑거리고 있는 카라를 잡고 훌렁, 내려버렸다. 덕분에 그의 왼 쪽 어깨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채 낫지 않은 시뻘건 상처의 끝들이 모여 있는 점처럼 보였다.

 

SM 플레이를 즐기고 기꺼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들은 그의 야릇한 사생활의 증거 따위가 아닐 테다. 까다롭게 구는 녀석이 매춘을 할 것 같지도 않으니, 강제 추행의 결과물일 터. 그것들을 목격하고 나자, 팬지는 이제 정말 더 이상은 제르미를 건들고 싶지 않았고, 그는 이를 스스로 '흥미가 떨어졌다'고 정의했다. 제르미는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제르미 버틀러는, 유흿거리가 못 된다. 바깥 소리에 귀 기울이면 인기척은 없다. 이제 밧줄을 풀어주고, 미완전한 증거 인멸을 시도해야겠다,

 

그랬으나,

 

줄곧 움직임이 없던 제르미가 또 발작하듯 몸을 흔들어 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엉엉, 커다랗게 울리는 목소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울리는 듯했다. 

 

어이, 미안하다고. 미안!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양 손바닥을 보여주며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지만, 제르미는 그런 것따위 제대로 쳐다볼 겨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완강히 도리질하며 엉엉! 울어댈 뿐이었다. 그가 느끼는 뜨악함은 단순히 이 상황에서 비롯된 것임이 아님을 팬지는 직감했다. 젠장, 꼼짝 없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생겼다! 이제 비는 것은 제르미 쪽이 아니라 팬지였다. 제발, 제발! 해치지 않아. 보이! 엉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움의 파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진폭으로 창고를 가득 메운다. 팬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 방 안을 왔다 갔다 한다. 구부정한 발걸음들이 자국도 없이 방에 산만히 수놓여도, 제르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거의 기절할 것처럼 울어 댄다.

 

어쩌면 밧줄을 들고 있는 자신과 누군가를 겹쳐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얀 그 눈동자! 아이, 섬뜩해라!

 

팬지는 현명하지는 못했지만, 머리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트라우마로 추정되는 무엇의 기폭제가 자기 자신이라면, 어찌 할 방도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을?

 

모딘의 탕아와 다름 없는 다른 무법자 친구들을 부른다면, 그들 중에는 분명 시시덕거리며 왜 다 잡은 먹잇감을 순순히 넘겨주냐고 다시 제르미를 범하려 드는 놈이 있을 테다. 누군가의 본성은 몹시 냉혹해서 충분히 걸레짝이 된 채로 곧 실신할 제르미를 굴러들어온 복으로 취급할 지도 모른다. 팬지는, 다시 말하지만 귀찮은 일에 얽히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으므로, 거세게 고개를 젓는다. 그 동안에도 제르미는 떠나갈 듯이 울다가, 숨이 막혀 잠시 헉헉거린다. 흥분한 녀석은 일시 정지 상태다.

 

그렇다면 모르는 누군가를? 차라리 위엣놈들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팬지도 교내에서 자신이 당하는 취급 정도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따라와 줄 사람도 묘연했을 뿐더러 이미 바닥인 평판이 지하를 뚫고 나락을 향한다 생각하니 내키지 않는다. 

 

제르미를 통제할 수 있으면서, 힘이 강해 반항하는 제르미를 뚫고 밧줄을 풀 수 있고, 자신과도 그럭저럭 아는 사람...

 

후배를 묶고 어떻게 해 보려 한 것과 별개로 자기 몸은 소중한 팬지였다.에먼 녀석을 데려온다면, 운이 안 좋다면 팬지도 흠씬 두드려 맞게 될 테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지는 하나 남았다.

 

그래, 분명 동생 일에 별 간섭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이런 일에도 면죄부를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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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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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제르미의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그로부터 꼭 4분 뒤였다. 이안을 찾은, 권투 연습을 위해 마련된 학교의 여분 공간에서는 얼마 뒤 그의 권투 시합 상대인 불도 기합을 지르고 있었다. 불의 우락부락 성난 근육질의 팔을 보며, 팬지는 이안을 부르길 잘 했다 생각했지만, 착각은 금세 관둬야 했다. 창고로 도착하자 마자, 실실 웃어 대는 팬지의 얼굴에 강하게 펀치를 날려 버렸으니까. 피할 새도 없었다. 우드득! 강하게 가격당한 코에서 드득거리는 소리가 났고, 팬지가 코를 붙잡고 신음하며, 찡그린 얼굴로 "이안, 내버려 두겠다며?" 애써 웃어보여도, 이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제르미에게 다가갈 뿐이다. 파렴치한 약쟁이! 제르미를 급하게 풀어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진정된 상태였더라면, 이안은 목적도 잊고 팬지를 흠씬 두들겨 팼을 지도 모른다. 

 

"젠장! 질이 안 좋은 녀석과 어울리지 마라 했잖아.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아악... 아악... 윽! 윽!"

"이 봐 이안, ... 이건 내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니까~..."

 

비열한 팬지는 몇 마디를 두서 없이 중얼거리지만, 이안은 걸러 듣는다. 여전히 진정되지 않아 몸을 부르르 떨어대며, 제르미는 신음한다.  이안은 다리를 구부려, 침대 위에 귀신이 든 숙주마냥 꿈틀거리는 제르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는다. 단발을 조금 넘는 기장의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칼이 상황에 걸맞지 못하게 부드럽게 찰랑인다. 팬지를 향해 고개를 돌려 쏘아붙인다. 

 

"썩 꺼져, 팬지. 염치도 없는 자식! 넌 나중에 두고 보자."

 

 

이안이 주먹을 쥐고 일어설 것 같은 몸짓을 취하자, 팬지는 부리나케 꽁무니를 뺀다. 손에는 여전히 밧줄이 덜렁 들려 있다. 알 만하군. 방해꾼이 사라지자, 제르미도 점차 차분해진다. 울음 소리와 신음 소리도 옅어지고, 일단은 몸에 힘이 빠졌는지 가만 누워 있는다. 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그의 얼굴을 내려보며 차게 식은 얼굴로 말한다.

 

"약을 한 건가? 그런 거라면 아버지에게도 말하겠어.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도 않더니, 이런 질 낮은 자식과 어울리는 걸 보면 집안 위신도 말이 아니게 될 거다."

 

문장 중에 어떤 것이 가여운 제르미를 자극한 걸까? 단어 사이에서 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녀석은 알 수가 없다.

그래, 일단 밧줄을 풀어 주려면 녀석을 완전히 진정 시킬 필요가 있다 ㅡ 이안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제르미를 흘겨 본다.

 

"...악, 으윽..."

 

뜨여 있는 눈은 분명 집요할 만큼 이안만을 담고 있는데, 고통스러운 악몽에 빠져 있는 것처럼 터져나오는 말을 신음으로 죽이기를 연거푸 반복하는 제르미, 이럴 때면 이안은 언제나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과거가 아쉽기도 하다. 한 번도 사람 마음 아는 데 간절해 본 적 없었으니, 꽤 신경이 쓰이는 양 동생의 탈선도 도무지 쉽게 가로 막을 수가 없다. 더 시간을 끌면 안 된다. 기껏 남아관으로 이주 온 녀석이, 바로 사고를 일으키면 정학 처분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사립 모딘 하이스쿨이란 그런 곳이었다. 이안은 목소리를 더 낮게, 작게 줄인다.

 

"가만히 있어, 팬지는 갔어."

"..."

"자, 봐. 아무 데도 없잖아."

 

이런 말투나 억양 같은 것도, 구사해 본 적 없다. 심지어 여자들도 이안의 제멋대로이고 저돌적인 매력에 휘말리곤 했으니,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조심스럽고 지긋하게 굴어 본 적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서툴고 어색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 했으나, 이상하게 제르미와 함께 있을 때면 이안은 점점 좁아져 오는 것 같은 긴장감과 박탈감, 그리고 묘하고 이질적인 충동에 사로잡힌다. 감옥이 아닌, 일직선의 통로 ㅡ 어느새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곳은, 맞은편에도 출구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서, 방향 따위 알 길이 없다. 정의할 수 없는 충동은, 분명 자신을 옥죄어 오는 듯 거북하고 부자연스러운데도, 그는 제르미가 여전히 궁금하고 애석하다. 팬지를 제외해도, 모딘의 몇 명은 제르미를 탐욕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은 제르미가 까다롭고 애타고 또 간절하다. 그래서 팬지 같은 경량한 녀석들이 제르미의 곁에 날파리처럼 꼬여 대는 것이 극심히 싫다. 

 

몸을 살짝 틀어 팬지가 정말 갔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제르미의 눈동자가 좌우로 살짝 움직이는 것에 주목한다. 그 몇 밀리미터가, 이안에게는 제르미의 의식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콜롬버스의 첫 몇 발자국 같다. 안도감에 손으로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긴 뒤, 하나로 묶은 머리를 당겨 꼿꼿하게 하고, 몸에 진폭되는 긴장감을 토대로 다시 제르미의 머리 앞에 제 것을 들이민다. 

 

"봐, 제르미."

"...하."

 

그제야 제르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눈빛에 총기가 돌아온다. 지친 듯 피로한 듯, 눈꺼풀이 옴싹이는 속도마저 무척이나 느리지만, 이안은 긴 눈꺼풀에 주목하며 안심한다. 

 

"이안... 뿐이야?"

"그래."

 

마침내 말까지 할 수 있게 되었군. 조금만 더 정신이 말짱해진다면, 낱낱이 캐물을 테다. 아버지와 산드라에게도 필요하면 모두 일러 바치겠어. 이 자식은 저택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학교 생활 중 벌써 몇 번이나 고결치 못한 소문이 도는 데다, 크고 작은 사건이 같은 카테고리 내에서 벌어지니 심신이 지칠 법도 하지. 

 

자리에서 일어선 이안은 지체하지 않고 제르미를 풀어 주기 위해, 침대 건너편에 놓인 왼 팔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제르미는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막상 딴 생각을 했나 보다. 갑자기 목을 빳빳히 세운다. 

 

"...뭐 해?"

 

그러자 그 상태로 굳은 듯, 한참이나 말이 없다. 입술을 옴싹이는 것이, 제르미, 설마 ㅡ 

 

"난 너한테 키스 안 해."

 

정곡을 찔린 듯, 제르미는 눈을 질끈 감는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습다. 저번 그 건 사고였을 뿐이라고. 이번에도 제르미는 대답이 없고, 그러면 이안은 두 말 하지 않고 왼팔을 동여 메고 있던 밧줄을 풀기 시작한다. 팬지 자식, 껄렁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제법 꽁꽁 묶어 두었다. 다시 부아가 치민다. 무의식 중에 손놀림이 거칠어 진 모양이다. 이안의 두꺼운 손가락에 체온이 느껴진다. 살펴 보니 제르미가 자신의 검지를 주먹으로 붙잡았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올려 두면 꼭 저렇게 붙잡곤 하는데,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제르미의 표정을 살피려고 하지만 제르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다. 도무지 의중을 알 수가 없군.

 

하지만 그 상태로 두니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는다. 하기사 어린 아이들은 저 나이 때에 스킨쉽이 무척 중요해서, 저런 것으로도 쉽게 유대감을 형성하고, 멋대로 좋아하기 시작한다고 하더군. 편안한 사람, 제르미 버틀러, 너는 아직 어린 아이인 거냐? 그래서 그런 것이 간곡하고, 나라도 그걸 줄 수 있다는 건가?

 

생소하다. 수십 번의, 어쩌면 수백 번의 잠자리나, 여성을 품에 안고 러브레터를 받을 때에도, 서른 먹은 유부녀 애인의 남편과 겨룰 때에도 이렇게 강렬한 자극은 느껴 본 적이 없다.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정말 싫은 듯 굴면서, 제 검지를 굳게 붙잡고 있는 녀석의 안색이 좋아지는 것이 신비롭고, 청아하고, 간질거린다.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 벌컥 일어나, 이안은 팬지와 다른 이유로 문득 제르미에게 제대로 키스하면 녀석이 어떤 반응을 할 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평생 모르는 채로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안은 그가 한참이나 손가락을 붙잡은 채로, 어깨의 떨림이 모두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어깨는 몹시 얇고 부실하다. 곁에 두었던 어떤 아가씨들보다 연약하고, 선이 곱고 하얗다. 외관만 봐서는, 제르미 녀석은 더 어리광을 피워도 될 듯 하다. 이런 종류의 것이라면, 그리고 자신에게 부리는 것이라면, 이안은 언제나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우 한 쪽의 밧줄을 모두 풀어내자, 손이 저린 듯 파르르 떨어 대는 녀석의 왼팔을 힘이 너무 들어가지 않게 신중히 주무른다. 팔 중심을 움푹 누를 때마다 으, 으, 하며 작게 얼굴을 찡그리는 꼴이 볼 만해서, 틈을 타 무의식중에 웃고 만다. 이안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지 모른다. 하지만 울그락 불그락 성난 근육을 찡그리며 시비를 걸어오는 불의 옆에서 권투 연습을 하는 것보다, 말 한마디 제대로 오가지 않는 이 일방적인 교섭이... '흥미롭다'고 이안은 정의한다. 제르미는 재밌다. 제르미 버틀러는, 꽤나 어리고 우습다. 

 

아예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쥐가 풀려 가는 제르미의 한 팔은 제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이번에는 제르미의 오른 손을 자신이 먼저 가볍게 그러쥔다. 아까 제르미가 눈동자를 깜빡이던 속도를 기억하며, 붙잡혀 깍지 껴진 손을 깜빡, 깜빡.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제르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고, 고개는 또 돌아가 어느새 다시 반대편을 보고 있지만, 이안은 차라리 그 편이 좋다. 녀석의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것보다, 자신의 표정을 감출 수 있다는 것, 노골적으로 제르미를 뜯어 보아도 아무런 타박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더 좋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레미를 집요하게 뜯어 보던 이안은, 순간 멈추고 둘 모두의 손바닥을 펴 쭉 대고 있게 한다. 제르미의 뺨이 붉게 보여지는 까닭은 분명 이전의 발작 때문이겠지만, 장난스레 한 마디 건넨다. 그래, 이런 추파가 이안 롤랜드의 것.

 

"이런 게 취향이야? 너, 생각보다 웃긴 구석이 있네."

 

여전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제르미는, 이런 문장은 싫었나 보다. 몸을 쥐며느리처럼 웅크리며, 땀에 젖은 머리칼만 보여줄 뿐이다. 그러면 이안은 웃는 낯으로 가만 그런 제르미를 지켜본다. 문득 생각한다. 그가 자신에게 더 응석을 부려 준다면, 이안 롤랜드의 것은 전부 궤멸시켜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그럴 정도로, 제르미는 흥미롭다, 흥미로운 것이다. 

 

"약을 했는지만 말 해."

 

그래서 이번 목소리는 제법 초조하다.

 

"안 했어."

 

한숨 섞인 목소리로 겨우 답하는 제르미는 이런 심경의 변화 따윈 영영 눈치 채지 못할 법도 하겠으나,

하지만 이런 것은, 이안은 생각한다. 평생 모른 채로 두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난 간다, 일어서려는 이안의 팔을 제르미가 한 번 더 끌어당긴다. 겨뤄 봤던 수 많은 남정네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연약한, 아주 미미한 힘이었지만, 이안은 사로잡힌 것처럼 침대 곁에 꼼짝 없이 다시 앉고 만다. 그제서야 제르미는 베개에 얌전히 고개를 댄 채로, 이안을 바라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동자.

 

그 눈동자!

 

찌르르, 아, 감전된 것만 같다. 그 눈동자만 아니었더라도, 이안은 그만 둘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훗날 맞아 곤죽이 되어서도 헤헤, 웃던 팬지는, 제르미 그 자식의 눈동자가 싫었다며 몸서리쳤다. 묶어 두긴 했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건들지 않았다고, 그 자식의 징그러운 눈 안에는 온갖 것들이 담겨 있어서 자신이 염오감이 들 정도였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안이 본 제르미의 눈동자에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섣불리 왜곡하고 곡해해서 제멋대로 해석해 낸 팬지 자식은 그래서 겪을 수 없었던 것이다. 無, 새까만 눈동자 속에 완전히 가득 찬 자신의 형상을. 제르미의 속에 가득찬 자신을!

 

제르미에게  유일한 자신의 모습을!

 

제르미에게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그 것을 목격한 순간,

 

이안은 앞으로 제르미의 눈동자가 아닌 그 어떤 곳을 방문해도 그 이상으로 즐겁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

 

 

초

라

한

 

그

 

눈

동

자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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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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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

 

이

안

은

 

멈

출

 

수

 

있

었

을

텐

데.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이안은 주로 자신을 탓한다. 이것도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이안 롤랜드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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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해는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Every understanding is a misunderstanding.

<Friedrich Wilhelm Nietzsc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