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사건 (과 여러가지 시도)

표지디자인 (내부 그림 DORI DORI님(@little_cjehfl) 님) ) 

강아지 사건.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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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로 감상할 수 있는 EPUB 파일

(리디북스, 알라딘 e북, e북 리더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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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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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11 / 빈유 

RPS (날조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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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M - Pet | Piano Cover

 

 

 

반복재생 해주세요!

 

PROLOGUE. 

 

  딸깍 딸깍. 김현빈은 마우스질을 하다 말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쉰다. 화면에는 ‘00대학교 기숙사’ 홈페이지가 떠 있다. 다리를 다쳐 육개월 알바를 못 나갔더니, 아 물론 낫는 데에는 한 달 정도 걸렸지만 환자는 그 정돈 더 쉬어도 되잖아, 자취방 월세를 못 내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 진료 확인서를 보여주면 주위에서 도와주고, 그래서 어떻게든 되고, 뭐 그런 그림을 그려왔는데, 얼굴 이름 익힌 동기들은 급작스러운 휴학에 유학에, 딱히 부탁할 생각나는 동창들도 없었다. 부모님에게 슬쩍 다친 사실을 알리기도 했지만 어릴 적부터 군말없던 아들이 설마 수동적으로 금전을 요구하고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그래, 잘 수습해라. 몸 조심 좀 하고.” 라는 예의 잔소리를 내뱉고 말았고, 그렇게 현빈은 다시 자취생 신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의자는 들어서 옮겨야 하나… 딸깍 딸깍, 아휴 이런 씨발. 

 

  열 일곱 때부터 자취를 해왔다. 존X 힘들었던 고삐리 자취 생존기가 끔찍해서, 대학 합격 직후 그는 즉시 기숙사에 입사했다. 사실 현빈은 당시 좀 외로움을 타는 중이었다. 다시금 그는 주위에 내킬 때 만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었고, 오래 자취생으로 살다 보니 그의 삶은 혼자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갖게 될 룸메이트라는 것에 내심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결국 기숙사에서 맞이한 첫 번째 룸메이트는 지나치게 예민했다. 바닥에 검은 머리카락이 한 올이라도 있으면 역정을 냈고, 머리가 제대로 묶이지 않으면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성질을 냈다. 한 학번 차이라도 엄연한 선배이거늘, 신입생은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 듯했다. 몇 번 티격거리고 나니 진이 다 빠져, 잊고 있던 자취의 맛을 다시 깨달았다. 외롭지만, 뭐 차라리 견딜 만 했다. 

 

그 이후로 2학년 2학기를 다시 자취생으로 보내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기숙사인데. 세상 일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 없구나. 머릿속에 그 녀석의 얼굴이 어른어른 떠올랐다. 유신, 너 이번 학기에도 기숙사 쓰냐? 룸메이트라는 이름에는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와 감상이 존재한다. 저마다의 추억과 사유를 담은… 그러나 현빈은 도저히 녀석의 태연스러운 낯을 다시 마주하기 싫었다. 

 

• 김현빈님의 기숙사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너, 이번 학기에도 기숙사 쓰냐? 복도에서 안 마주치게 알아서 잘 피해 다녀라. 파란 꽁지. 그의 3학년 1학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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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신입학 후 첫 개강날이 가까워지자 유신은 무엇보다도 기숙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본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할 말은 최소화하며 살아온 것이 지난 인생 이력이었다. 숫기 없고, 이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래서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의 인생도 그럴 예정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4시간 타인과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은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 엄마. 학교랑 멀어도 통학할래.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유신을 걱정했다. 우리 아들이 어떻게 하루에 몇 시간씩 통학을 해. 그냥 하겠다고 더 억지를 쓰고 싶었지만, 몇 백명의 땀냄새가 머무는 공간을 겪어 보니 한 명분의 것이 차라리 효율적이란 생각에 그만 수긍했다.

 

  차라리 받아들이고 나니 일말의 호기심이 들기는 했다. 어찌 됐든 사람인지라, 홀로 영화를 볼 때면 장면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싶을 때도 있었고, 캠퍼스 내 요란스런 녀석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궁금하기도 했고, 과제가 쌓인 날이면 술맛은 어떤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대학가 술집에서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을 깡은 없었다. 룸메이트라는 이름에는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와 감상이 존재한다. 저마다의 추억과 사유를 담은… 유신은 자신의 상대가 줄 감상이 고대됐다. 세간에선 이런 것을 기대라고 부르지만, 유신은 잘 알지 못했다. 언제까지 그랬냐면…, 실제로 자신의 룸메이트를 맞이할 때까지 말이다. 자신보다 한 학년 위라고 했다. 시꺼먼 녀석은 자신만큼이나 말이 없었다. 검은 져지를 입고 등교해서 돌아와 씻고는 검은 반팔로 갈아입었다. 사나운 눈깔로 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난생 이런 못된 시선은 처음 받아 봐서 재수가 없었다.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여러 날 있었다. 없는 사회성을 끌어 모아, 몇 번 구태여 말을 걸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했고, 가끔은 담배 냄새까지 풍겼다. 그러고 나니 자신도 빈정이 상해 낯을 마주하는 것도 꺼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은 다시 기숙사 입사 신청을 했다. 자신이 부여한 룸메이트라는 환상에 저런 추악한 기억만을 각인시키고 싶지 않았다. 오기가 들었다. 김현빈 그 자식 때문에… 하지만 2학기는 배정 실패로 룸메이트 없이 독방을 쓰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찾아온 2학년 1학기. 이번에는 부디 멀쩡한 룸메이트를 만나, 멀쩡히 지내고, 얘기도 좀 하고 아 씨 밥도 좀 먹어보고… 뭐 그러게 해 주세요. 

 

  아시겠죠, 하느님? 딱히 믿진 않지만 부탁드립니다. 그럼 앞으로는 지위를 조금 격상시켜 드릴테니…

 

/ NEWS /  /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 정체 모를 증후군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강아지병”으로 불리고 있는데요… 감염 경로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아, 예방할 수 있는 방도가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해당 병에 걸린 환자들은 강아지와 같은 행동 양식을 보이는데요, 증세가 심해지면 네 발로 걷거나 하는 등…  … 이 병이 치료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대감을 회복하는 것으로, 따라서 치료가 불가해보이는 독거 직장인 등은 회사 등에서 무작정 해고되는 일도 빈번히… 이는 하나의 사회 문제로…/

 

월요일.

반가울 리 없었다.

 

310호, 유신은 개강 일자보다 며칠 일찍 도착해 짐을 풀어두고 새로 올 룸메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좋게 시작하고 싶어 머릿속으로 안 어울리게 인사말까지 몇 번 고민하는 성의까지 보였었다. 그런데 개강 일 바로 직전까지 룸메이트는 입소하지 않았다. 저번처럼 개강 직전에 휴학을 결심한 건가,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불안해 층장에게 문의해봤지만 층장은 오히려 상대는 유신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알아갔다며 그런 것은 아닐 거라 했다. 

 

아니, 그런데 왜 입소가 늦어지냐고요. 저는 이름을 외운 동기도 몇 없었으니 이 협소한 인망에서 저를 고의적으로 피할 사람이라면 한 놈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설마 그 자식일 리는 없고요. 

 

그 때의 불안감을 재빨리 상쇄하려 했는데, 그것은 이제 와 보니 당도할 현실에 대한 마지막 발버둥이 아니었나 싶다. 마침내 개강 전 날, 여전히 입사하지 않은 룸메이트의 빈 침대를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고 제 것에 누워 불을 덜컥, 끄는데,

 

급작스레 현관을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첫 날부터 술 먹고 온 신입생이 주정부리나 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집요하게 310호 문만을 긁어대고 있었다. 짐이 많아서 문을 열 손이 없는 건가, 그런데 그렇다면 잠깐 내려두고 열면 될 텐데. 벅벅벅. 긁긁긁. 내가 가서 열어줘야 하는 건가, 또 개차반 룸메이트를 만난 건가… 마침내 생각은 여기까지 이어졌다. 김현빈. 이 x끼가 갑자기 보복, 테러라도 하러 온 건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과연 눈 앞에 김현빈이 있었다. 그러나 유신이 예상한 것처럼 손톱의 날을 세우고 그를 노려보거나, 화염 방사기를 들고 있거나, 총기를 들고 장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척이나 처량하게 현관 문 앞에 주저앉아 유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하, 끼잉. 안녕, 유신아.”

“씨발 뭐야.”

“...강아지병 알지? 뉴스에 난리잖아. 나, 너랑 룸메 또 된거 보고 좆됐다 싶어서 다른 방 쓰려고 며칠째 문의했는데, 이제 빈 방이 없대…”

“...그럼 네가 다시 내 룸메라고? 이상한 바이러스까지 걸려와서?”

“...염치 없지만, 다음 주면 교환학생들 방 빠진다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신세 지면 안될까? 끼잉, 끼잉… 뭐 물론 이런 좆같은 병 걸린 채로는 못 나가긴 하는데…”

 

… 뭔 개 좆같은 소리야, 유신은 생각했지만, 짜증나는 그가 행정 처리상 정말로 그의 룸메이트라면 이제 어쩔 방도가 없다. 하는 수 없이 거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유신은 다짐했다. 아무리 구역질 나는 상황이 있어도 최대한 빨리 그에게 “유대감”을 줘 내쫓아 버리겠다고. 그래, 딱 일 주일 만이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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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하지만 아무리 그런다 한들 유신에게도 비위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다. 마음 먹은 것과는 달리 방에 있을 현빈을 마주치기 싫었던 유신은 태어나 처음으로 강의실에서 남아 과제를 했다. 경비가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하자 정문 바로 옆의 스타벅스로 갔다. 사람 많은 환경은 질색인데, 안에는 조별 과제를 하러 온 학생들부터 수다를 떨러 온 녀석들, 서로 못 붙어 안달인 연인들까지 한가득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아무리 집중을 하려 한들 귓가에 어른거리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자꾸 그를 방해했다. 김현빈만, 아니었더라면… 나도 어쩌면 오늘 새 룸메와 이 곳에 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게 기숙사로 털레털레 걸어온 것이 오후 열 시 사십 삼분. 그런데, 현관을 열자 마자

 

“...뭐야, 계속 이러고 있었어?”

“끼잉, 낑. 심심해서 그냥 기다렸지… 야, 왜 이리 보고싶었냐…”

 

신발장 앞에 김현빈이 털썩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낯간지러운 소리에 얘가 진짜 심각하게 어떻게 된 거구나, 깨달을 찰나, 김현빈은 휴대폰 충전 선을 꼬리라도 된 것처럼 훌훌 흔든다. 와, 진짜 재수없어. 너무 적응 안 돼. 끔찍해. 당장이라도 다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기숙사 통금 시간은 11시다. 이제 나가면 온 새벽을 바깥에서 지새워야 한다. 불필요한 고생은 하지 않으려는 유신의 성격상 나가서 몸 힘든 노숙을 택할 수는 없었다. 별 수 없지. 위기감을 느낀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유신은 다시 생각한다. 일주일만 눈 딱 감는 거야. 빨리 바이러스를 털어 낼 수 있도록 시키는 건 다 해주자. 아니, 내가 자원하자. 양로원 봉사라고 생각하자, 나는 환자를 도와주는 거다, 씨발 그런 거다…

 

토요일

 

그간 유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유신을 아는 사람들이 그를 봤으면 놀라워했을 것이고, 부모님은 박수를 쳤을 것이며, 유신 스스로도 경이를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유신은 수업 빼고 달리 갈 곳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시간을 기숙사 안에서 보냈고, 김현빈은 이에 질세라 유신을 귀찮게 했다. 유신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으면 그 옆에 앉아 자꾸 유신의 무릎에 고개를 기대어 왔고, 강의라도 갈 쏘면 빨리 돌아오라며 눈꺼풀을 슴벅였다. 혈압이 올라 당이 땡겨 초콜릿이라도 먹고 있으면 한 조각만 달라며 울망였다. 습관적으로 “강아지는 초콜릿 먹으면 안 돼.” 하다가, 김현빈이 “...씨발 그래도 나 사람인데.” 하는 말 듣고 정신을 다시 차렸더랬다.

 

병에 걸린 김현빈은 무척이나 말이 많았다. 말을 못 해 죽은 참새의 귀신이라도 씌인 것 같았다. 유신은 끊이지 않는 그의 말소리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어쩔 때에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그의 턱을 긁어주기도 했다. 빗을 들고 와 그의 머리를 빗겨주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잘 씻고 나와 윤기가 도는 검은 머리칼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머리카락 사이에 잠시 손을 얹어두고 그 결을 느끼고 있으려니, 멍때리는 유신에게 김현빈이 뭐 하는 것이냐고 한마디 했다. 유신은 아차, 하며 마저 빗질을 했다. 김현빈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고, 씩 웃기까지 했다. 이전 룸메이트를 할 때에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표정들에 유신은 자존심 상하지만 보람마저 느낀 것 같다. 지난 학기에는 머리 몇 가닥 떨어졌다고 역정을 낸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질 때쯤엔, 이미 틈 날 때마다 머리를 빗겨 주는 취미가 생긴 뒤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 주를 거의 종결시켰건만, 김현빈의 바이러스에는 거의 차도가 없었다. 유신은 모오오옵시도 피곤해졌다. 이 개새끼가 언제까지 나를 괴롭히려는 거야. 메트리스 위에 누워 그 밑에서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유신아, 유신아 하는 현빈의 머리를 시선조차 주지 않고 쓰다듬고 있었던 그 토요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말까지 빼앗기는 것은 불합리했다. 요 며칠 새벽까지 현빈의 침대가 아닌 제 침대 밑에 누워 묻지도 않은 말을 새벽까지 하는 현빈 덕에 제대로 잔 날이 없었다. 낮잠이라도 자야겠어. 아주 끝내주게 자야지. 그렇게 눈을 슬 감을 때였다.

 

벅벅벅, 긁긁긁. 아, 이 익숙한 소리…

 

반사적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킨다.

 

“아오, 씨발 좀. 야, 대체 뭐가 문젠데?”

 

“...있잖아, 신아.”

 

이 남사스러운 호칭은 뭐람.

 

“...어, 뭐. 친한 척 하지 마.”

“끼잉, 왜 그래 우리 친한 거 아니었어?”

“아니야, 아니라고.”

 

녀석이 무슨 말을 할지 묘하게 궁금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유신은 이 지뢰덩어리가 어떤 사고를 칠 지 몰라서, 그게 두렵기 때문이라서 그렇다고. 머릿속으로 재빨리 합리화를 했다. 

 

“...나, 한 주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너무 힘들어. 끼잉, 아니 방에 있는 건 좋은데 답답해. 나가서 공도 차고 산책도 하고 그러면 안 돼?”

 

이게 무슨 개소리야. 배려심마저 강아지 수준이 되어 버린 김현빈이다. 아니, 그 전에. 이 자식이 진정 지난 학기 내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불 키면 소리지르던 어둠의 자식 맞아? … 그래도 따져 생각해 보니 한 주 내내 이 방 외에 어디도 가지 않았으니, 좀이 쑤실 만 하다. 편의점, 학교, 이런 좁은 행동 반경이라도 분명 그 전엔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니까. 유신은 수긍한다. 하필 지금인 것은 배은망덕했지만. 평일에 저렇게 몸을 비비적대는 현빈과 캠퍼스를 돌아다닐 깡은 없었기에, 유신은 이마저도 수긍한다. 요즘 수용력이 잔뜩 늘었다. 세상이 날 억까하는 거 같아 씨발.

 

크게 한숨을 쉬고 일어난 유신은 기숙사 비품실에서 축구공과 소프트볼 하나씩을 빌려 왔다. 장부에 이름을 적는 것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뭐 병신같은 이유라고 해도 내가 자의적인 외부활동도 다 해보는구나. 이상하다, 원래라면 마음에 드는 룸메이트와 했으면 좋을 법한 일인데. 원래의 김현빈은 운전을 할 줄 알지만, 강아지가 되어버린 녀석은 틱이라도 걸린 것처럼 갑자기 이곳저곳을 박박 긁어대는 통에, 지금 운전대를 잡게 하면 둘은 황천길에 갈 운명임이 명확해 보였다. 유신은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뒷자리에서 현빈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와, 나무. 와, 바람. 와, 한강이다.” 하며 신이 난 어린애처럼 한 마디씩 할때마다, 유신은 쪽팔림이 엄습했지만 그를 제지하면 증상이 악화될까 두려워 군 말 안하고 그의 손을 꾹 쥐었다. 운전 기사가 차량 내부 백미러로 자꾸만 그들을 번갈아 살피는 것이 거슬렸다.

 

그렇게 도착한 한강공원에서 둘은 여섯 시간이나 공을 찼다. 유신은 죽을 지경이었다. 평소 좀비처럼 바닥을 기어다니는 녀석에게 어찌 저런 체력이 났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현빈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폴짝 폴짝 뛰어다니고, 네트에 몸을 부딪히고, 벤치에 아무렇게나 누워 쉬었다. 사람들이 몰려올 때면 유신은 얼굴까지 화끈거렸으나, 이렇게 땀 흘려 놀아본 것은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상쾌했다. 게다가 저렇게 티 없이 기뻐하는 얼굴의 현빈이라니. 햇빛 아래에서 제대로 응시한 땀에 젖은 녀석의 얼굴은 꽤 잘생겼다. 오래 나가지 않아 흰 피부와 상반되는 완전히 새까만 머리카락, 야비하게만 보였던 시원하게 째져 올라간 눈매와 보기 좋은 선을 그리는 콧대. 짜증나게 잘생겼네, 원래 이 새끼가 이렇게 생겼었나. 내가 저러면 밖도 돌아다니고 친구도 사귀고 그랬겠다. 쟤는 뭐가 부족해서 나처럼 히키코모리마냥…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서, 단순히 그래 그것만이야. 

기왕 공 대여하는 법도 알았겠다 주말마다는 좀 나가 놀아줄까 싶었다.

 

몇주 뒤 월요일

 

  분명 일주일이면 녀석을 책임 지고 완치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벌써 3월이 끝순이었다. 현빈은 노력과 케어에 힘입어 하루하루 더 윤기가 생기고 눈빛이 총명해졌으며 말소리에도 힘이 생겼다. 하지만 강아지병 자체에는 별 차도가 없었다. 왜지, 미친. 난 분명히 매일…

 

  그간의 변화로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안 그래도 시꺼먼 자식이 바닥에서 매일 잠드는 게 보기 불편해서, 제 침대로 몇번이나 가라고 지시했는데도 말을 들어먹지 않아서, 그래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건 강아지가 아닌 인간의 일이니까, 허락 하에 녀석은 함께 좁은 유신의 침대에서 나란히 누워 잤다. 그렇게 되니 녀석의 말소리도 잘 들리게 되었는데, 귀찮아 흘려 들었던 내용의 대부분이 유신아, 넌 재수 없지만 나름 착한 것 같아. 자신에 대한 감상이라서. 못마땅하지 않았다. 들어주는 재미가 있었다. 세심히 들어주니 녀석도 만족스러운지 비교적 잠에 일찍 들었다. 갑자기 몸을 푹 안아버릴 때에는 깜짝 놀랐다. 밀어내려 했지만 좋다고 생각했던 머리칼의 향기가 푹 끼쳐오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 내가 반항하면 또 강아지병 이거 이거 평생 가는 거 아냐. 한 번 더 아량을 베풀어 주지 뭐. 그렇게 잠든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몇번 토닥여 주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녀석은 잠결에도 이를 알았는지, 더 노골적으로 몸을 붙여 오고는 했다. 가끔은 자다 말고 일어나 신아, 신아 하며 팔과 정수리 같은 곳을 쓸었고, 언젠가 한 번은 뺨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무척이나 짧은 찰나였지만, 유신은 참지 못하고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런데 녀석도 눈을 뜨고 있었다. 삼 센치도 안 되는 간격, 누운 채로 나란히 둘은 한동안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현빈은 씩 웃고 있었다. 그 날 햇볕 아래에서 봤던 것처럼. 유신은,... 

 

작년에도 이렇게 굴었다면 너를 안 싫어했을 거야. 

어쩌면 좋아했을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혼자 했다.

그 주 금요일

 

붙어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다른 사람 눈에 어색해 보일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기사 평소에 말 나눌 사람도 마땅히 없어 이런 인식을 공유받을 기회가 없었다. 

 

“유신아, 너 김현빈 선배랑 친해?”

 

2학년 과대를 맡고 있는 동기 여자애였다. 전공 강의가 막 끝나 학생들은 강의실을 벗어나고 있었고, 갑자기 말을 걸어온 동기라는 것이 어색해 유신은 여자아이의 무리가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대답을 했다.

 

“어, 어 응? 어, 그런가”

 

“너 지영이 알지? 저기, 쟤. 탈색한 여자애. 걔가 지난 학기에 자취하면서 윗집 사는 오빠한테 반했다고 노래 노래를 부르더니, 글쎄 그 사람이 너랑 붙어다니는 걸 봤다는 거야. 이름도 용케 알아왔더라, 그런데 그 분이랑 친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 없어서.”

 

너희 주변만이겠냐, 그 사람은 원래 없어. 원래 외로워 해. 봐, 이상한 병같은 거나 걸려 오고.

 

“너만 괜찮으면… 연락처 주면 안 돼?”

“...걔가 낯을 좀 가려서,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걔? …”

 

유신, 그렇게 안 봤는데 매서워 보이는 선배랑 그렇게 편한 사이였구나, 하며 신기하게 보는 눈동자였다. 하여튼 유신은 순순히 번호를 넘겨 주기 싫었다. 짜증나잖아. 내가 다 교화시키고 키우고… 그리고 너희는 아마 백 날 같이 붙어 있어도 그런 일 없을 걸. 그러니까 그런 일이 뭐냐면 우린 월요일에…

 

하, 씨발. 유신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가는지 모르고 순박하게 생긴 과대 여자애는 뜬금없이 불러낸 것이 마음에 쓰였는지 한 마디 더 했다.

 

“그리고,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갈 건데… 아 형규 오빠랑 진철선배도 와. 같이 마실래? 우리 그래도 일 년 넘게 동기였는데 술도 한번 안 마셔보고 뭐냐! 유신 너 너무 빠져.”

 

죄다 누군지도 모를 이름들이었고, 분명 지영이라는 애도 올 자리에 끼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입 안에서 벌써부터 한 모금 마셔본 게 전부인 알코올 맛이 씁쓸하게 느껴져 왔다. 술 생각이 났다. 유신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주위로 그들 무리가 모여들고 있었다.

 

2학년 1학기 4월 중순, 동기들과의 늦은 첫 술자리. 과대 여자애는 말이 많았고 화제를 돌리는 센스가 좋았으며, 진철과 형규 선배는 과묵을 행세하는 건지 파고드는 농담에 재치가 있었으며, 지영이는 술게임 하자고 먼저 목소리를 높이더니 제일 먼저 취해서는 옆자리에서 유신앙, 나 꼭 소개 시켜줘야 해? 나 진짜 보고 반했잖앙… 너도 잘생겼는데 내 취향은 약간 그런… 하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잘 어울리고 즐거워 보였다. 다들 말이 참 많았다. 유신은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정신 없는 그들 사이에서 혼자 잔을 채우고 마셨다. 이를 반복했다.

 

늦게 배운 술이 무섭다고, 혼자 마시니 정신 없이 취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추근대는 지영에게 “김현빈이 너 싫대. 아직 모르지만 싫대 그냥.” 한 것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는 전부 아득하게…

그 주 토요일

 

필름이 끊기고 눈을 떠 보니 현빈이 열심히 제 뺨을 핥고 있었다. 

 

뭐야, 미친.

 

“이제 일어났어?”

 

라고 묻는 현빈을 제쳐 두고 잠시 생각해 보자.

 

기억이 안 나는 거 보면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는데. 언뜻 언뜻 기숙사 입구까지 형규? 병규? 씨가 데려다 준 것도 같고. 복도에 누워 있던 건 꿈인가 현실인가? 와 얼마나 마신 거지 머리 존나 아파. 그래도 용케 들어온 거 보면 좀 자부심을 가져도 될 듯하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신아, 괜찮아?”

 

현빈이 다시금 뺨에 입을 맞춘다. 그리곤 어깨를 안고 옆에 같이 누워버린다.

 

“어제 하도 안 들어오길래, 복도로 나왔더니 네가 누워 있더라. 그래서… 내가 데리고 들어왔어. 왜 그러게 두고 나갔어. 어이 없네.”

 

라고 말하다가 한 마디 덧붙인다.

 

“칭찬해 줘.”

 

유신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녀석이 가만 있기를 바라며 겨우 대꾸한다. 

 

“...잘 했어.”

 

“뭐가?”

 

“기다려준 것도 데려와 준 것도…”

 

자꾸 왜 이런 말을 시키는 거야. 

 

“그만 물어봐.” 한 마디 더 덧붙인다. 반문하는 현빈.

 

“왜?”

 

“존나 집요하고… 말하기 좀…”

 

현빈이 유신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유신은 현빈을 겨우 돌아본다. 

더 칭찬해 달라는 듯, 아껴 달라는 듯, 시선에 간절함까지 보인다. 

결국 유신도 백기를 들 수 밖에 없다.

 

“...그래, 나도…”

 

“응, 신아.”

 

“...나도 네가 있어서 좋아. 이제.”

 

어쩌면 다른 룸메이트를 찾고 싶었던 게 아니라, 네가 이래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 나는. 

,

그 날 이후로 현빈의 증세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호전되었다. 또 다시 한 주가 지나자, 눈 떠 보니 현빈이 없는 것이다. 유신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재빨리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방 안 이곳저곳을 헤집다가, 급박히 슬리퍼만 신고 모자도 안 챙긴 채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기숙사 행정실에서 멀쩡히 걸어 나오는 현빈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뭐야, 너 뭐 해? 어쩐지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오후에 갑자기 인터넷이 안 돼서요, 라는 핑계를 대며 행정실에 방문해 떠보듯 묻자 알게된 사실은 현빈이 빈 호실로 옮길 수 있는지 묻고 갔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다곤 말 했죠, 어차피 빈 방이라 상관은 없거든요. 사유가 룸메이트랑 안 맞아서라는데,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아니, 무슨 소리야? 나랑 안 맞아서 나간다고? 왜? …난 분명 같이 있어서 좋다고 말 했는데. 그 이후로 현빈의 외출은 더 잦아졌다. 한 번 물어보니 가구점에 다녀왔다고 했다.

 

“학기는 안 끝났지만 그냥 퇴소하고 자취하려고.”

 

왜? 씨발 왜?

 

그 주 주말에는 부동산에 다녀오겠다며, 아주 이른 시간부터 사라져 버렸다. 점심에 컵라면을 해 먹는데 한강에서 먹던 그 맛이 안 났다. 공을 만진지도 오래 됐고, 현빈은 언젠가부터 자처해 자신의 침대에서 잠을 잤으며, 생각해 보니 이제 강아지 같은 짓도 하나도 안 하지. 

 

언젠가부터 유신은 현빈을 기다리는 것이 익숙해지게 되었다. 속도 모르고 현빈은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꾸 길어졌고, 유신은 잠시라도 시간이 겹칠까 방에서 나서지 못했다. 혼자인 방 안은 무척이나 지루하고 외로웠다. 일어나 머리를 빗고, 빗의 머리카락을 빼 내며 언젠가부터 자취를 감춘 검정 머리카락들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유신은 현관문 앞에 앉아있게 되었다. 더 할 일이 없었고, 마땅히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딱히, 다 별로… 김현빈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하루, 이틀 사흘…  김현빈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문이 벌컥 열린 것은 

 

한 주가 더 지난 월요일

 

이었다. 현빈은 신발장에서 신발을 벗으며, 작년처럼 시니컬한 얼굴을 되찾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 이제 방 다 구했다. 며칠 있으면 입주할 것 같아. 그동안 신세 많았다.”

 

유신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 나가면 안 돼?…”

 

큰일났다, 전세 역전이다. 싶었다.

하지만 참아낼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래서 유신은 주저앉아 일어서기 위해 현관 문을 긁기 시작했다.

 

“김현빈. 가지 마.”

 

이 310호실에서, 계속 계속 머물러주면 안 돼? 그럼 안 돼?

 

입안에서 멋대로 끼잉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빈과 유신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현빈이 굳은 얼굴로 한 마디 했다.

“너, 그거 병이야.”

EPILOGUE

 

“...솔직히 나 그동안 제정신 아니었잖아. 네가 다 받아준 거니까 민폐라고 생각했지. 다른 방으로 가려다가 복도에서 마주치면 심란할 것 같아서 그랬어.”

 

학기가 다 끝나가는 날, 반쯤 마신 캔맥주를 들고 기숙사 침대에 누워 현빈은 그렇게 말했다. 쭉 뻗은 곧은 다른 쪽 팔을 팔을 유신이 베고 누워 있었다. 유신은 작은 목소리로 투정했다.

 

“네가 방 빼놓고는 네가 뭘 심란해.”

 

“그럼 넌 왜 나보고 가지 말라고 했어.”

 

“넌 너무 짖궂어.”

“말해봐, 유신. 내가 왜 안 갔으면 좋겠냐고.”

 

“다 알면서 꼭 말로 설명시키는 점이 싫어.”

 

“내가 지금 내가 왜 싫은지 물어봤어 씨발?”

 

“예전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이렇게 못된 말 하는 것도 싫어.”

“내가 바라는 게 많냐? 네가 바라는 게 존나 많은거지”

 

“...쓸데없이 현실적인 것도 싫어.”

 

그렇게 말하면서 유신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올려놓았다. 현빈은 자연스럽게 쓰다듬었다.

 

“신아.”

 

“...뭐.”

“나도 싫어?”

 

“그런 건 아냐.”

 

“나도 너 좋아. 정말 존나 좋아하는 거 같다 신아.”

 

그 목소리만은 참 부드럽게 들렸다.

 

“...어.”

 

“다음 학기에도 기숙사 쓸 거야?”

 

“...너는?”

그러자 현빈은 몸을 일으키고 기다렸다는 듯 유신의 얼굴에 제 것을 가져다 대었다. 이번에도 삼 센치도 안 될 거리, 서로의 숨소리가 맞닿는다.

“같이 살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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