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蟲) 의 형태를 띄고 있는 나의 신

충신

---

---

BGM 반복 재생 후 감상을 부탁드립니다.

@402_cms 선메 <온점 두 개 타입> 비숑님 커미션 작업물

출처 삭제 외의 모든 전제 / 사용이 자유롭습니다.

벌레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 살인(살해) 장면이 등장합니다.

 

지정 문장 1) 엘리자베스는 샌드위치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2) 이곳은 집이 아니라 무덤이었다.

---

2022.10.17 

공백 포함 12,153 / 미포함 9,042자

https://www.youtube.com/watch?v=sbzShsmbxF4

---

 

10월 31일은 애초에 11월 첫 일의 저주를 방지하기 위해 탄생한 날이다. 현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티를 보낼 수 있는 기념일로 삼게 되었지만, 엘리자베스를 만난 이후 언제나 저주스러운 삶을 보냈던 박준태에게는 어김 없이 저주가 내려졌다. 

 

저주란 애초에 그 근원을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으로, 급작스레 닥쳐 한 영혼을 영구히 파멸하려 든다. 한 번 빼앗긴 지각능력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소멸된 정신력의 일부가 수복된 박준태는, 빠르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새 제대로 정의조차 할 수 없는 존재에게 저당 잡혀, 모든 인간관계와 미래가 단절된 채 샌드위치 종업원이자 그의 동반자, 비슷한 것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될 것이라는 매섭고도 시린 현실을 말이다. 

 

그러니 해피 할로윈, 박준태는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서비스업 종사자는 전 세계 어디에서든 제대로 된 여유를 허락받기 어렵다. 따라서 그는 “준태야, 빨리 나오렴. 오픈 시간이 임박하고 있단다.” 하는, 평화로운 음성에 꼼짝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별 거 없는 옷장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면을 반사적으로 들어 착용하고 나니 머리는 산발인데 저는 히죽 웃고만 있다. 거울에 비치는 제 의사 없이 웃는 낯을 이리 저리 뜯어 본다. 익숙치가 않다. 아무래도 익숙치 못하다.

---

 

엘리자베스는 이미 멀쩡하게 환복한 채였다. 샐러드를 푸는 스쿱으로 거대한 자루에서 열심히 퍼 담고 있는 것은 분명 다리가 몇 개인지 한 눈에 세아릴 수도 없는 벌레다. 오래 끊어져 있던 의식은 제대로 된, 명확한 사고를 방해한다. 어렴풋 떠오르는 과거 - 마약을 팔던 자신과 이를 포함한 샌드위치를 제조하던 엘리자베스 - 를 미루어 보건데, 원래도 엘리자베스가 샌드위치에 흉측한 장난을 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별개로 윤기 나는 등딱지를 중심으로 두고 꾸물거리는 벌레 다리들의 화합을 보고 있자니 토기가 든다.

 

의식은 점차 또렷해지고 있지만, 누군가 솜뭉치로 회로를 뭉개는 것처럼 노곤하고 뭉실하다. 비명도, 도망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 조차도 제 멋대로 되지 않는다. 하기사 지금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눈 앞의 상대는 무엇인가 박준태에게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우칠 테지. 가엾도다, 이리 당장의 생명을 부지한다. 죽고 싶다는 감상은 일시적인 착각이었나? 엘리자베스는 벌레들을 샌드위치 빵조각 사이에 끼워 넣느라 여념이 없다.

 

“벌레들은 귀엽지 않니?”

 

급작스레 엘리자베스는 양배추를 써는 두터운 칼을 자루에 밀어넣는다. 꺼내 들면 날카로운 쪽에 몇 마리가 찔려 버둥이다 이내 행동을 멈춘다. 적막, 박준태가 대꾸하지 않자 엘리자베스는 다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왜, 정말 하잘 것 없는 것들이… 이렇게 누르면 바로 죽어버린다는 게, 나는 가끔 안타깝단다.”

 

하지만, 박준태는 생각한다. 그렇게 치면 엘리자베스에게 인간과 벌레, 자신과 벌레는 하등 다를 것이 없지 않나. 벌레들의 시체가 꽂혀 있는 칼날을 주시해서 비위가 상한 것인지, 들리는 말의 역겨움을 참을 수 없어 작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박준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엘리자베스는 만족한 듯 아무렇게나 칼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박준태는 반사적으로 이를 주워든 뒤 엘리자베스 옆에 우뚝 서 자리한다. 도마에 칼을 올린 채, 들러붙은 벌레 사체들을 분리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지나간 시간들의 편린. 스컹, 칼의 질감이 만드는 스산한 소리에 몸을 작게 떤다. 

 

틱, 투욱, 툭. 탁. 느리지만 꾸준히 회복되는 의식 탓에.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다시금 부인할 수 없는 혐오감이 그를 괴롭혀 입술을 굳게 다물게 한다. 드물게 박준태의 얼굴에 진 주름들을 엘리자베스가 볼 수 없어 다행이다. 스쿱, 벌레, 꿈틀거림, 가소로운 것들, 간단한 것들, 그냥 그렇게 다 쉽게 죽어 버릴 것들, 나, 엘리자베스의 여유 만만한 흥얼거림, 툭, 투욱.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벌레 사체들에서 다리 몇 가닥이 머리카락처럼 떨어져 나온다. 

 

가소롭고 아무것도 아닌 그냥 그렇게 다 죽어 버릴 것들.

 

박준태는 흘긋 옆눈으로 엘리자베스의 동태를 살핀다. 여전히 벌레들을 스쿱에 옮겨 닮느라 여념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샌드위치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아끼고 있는 것 같고,

 

어찌 되었든 두 가지는 아직까지 박준태가 소유하고 있는 다행이다.

 

괴멸당한 삶이여, 스스로의 비루함과 치욕스러움은 그대로 일방형 증오로 자리잡았다.

저주는 저주를 파생시키고 잉태하고, 결국 개 중 하나는 명확한 형태를 이룬다.

 

여전히 제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콧노래에 열중한 엘리자베스를 흘긋 훔쳐 본 박준태는, 팔을 들어 허공에 대 보였다. 시야의 중심, 우뚝 서 있는 칼과 그 뒤의 당신.

 

박준태는, 엘리자베스가 죽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해피 할로윈. 오늘은 아직 산 자들의 날입니다.

---

끊임없는 시달림이 무색했을 정도로 엘리자베스는 쉽게 죽음을 맞았다. 

 

양배추와, 벌레 뒷다리가 채 모두 떨어져나가지 않은 양배추 칼을 몇 번 휘두르다 목 한중앙에 꽂아버리자 벌레들의 다리만치로 파들거리며 제 것을 떨었다. 사람보다는 버티는 능력이 출중한지 죽는 순간에도 박준태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았는데, 벌린 입 안에 존재한 것이 오로지 無라, 오금이 서렸다. 문득 박준태는 영화 속 살인자들이 시체의 눈을 감기는 이유를 이해했다. 유대감 따위 전혀 존재치 않아도, 서슬 퍼렇게 말라붙은 동공을 견딜 수 없는 까닭이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저 인외(人外)란, 숨이 끊어진 것이 정명해도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압도가 있었다. 無 안에서 검게 덩어리 진 것이 꼭 절단된 신체의 일부처럼 굼뜨게 떨어져 나왔다. 가만 두고 보니 혀였다. 거의 엘리자베스의 가슴께까지 내려온 이것은 발발거리는 벌레의 형을 모방하기라도 하는 듯, 잦고 작게 진동했다. 모든 동작이 멈춘 신체에서 잘린 도마뱀의 꼬리인 양, 제 존재를 입증하기라도 하는 양, 홀로 유영하듯 움직이며 제대로 된 발음으로 분명 이렇게 말했다.

 

“준태야.”

 

가면 너머의 존재는 쌕쌕이고 있었다. 너머로는 박준태의 맨얼굴을 응시하고 있을 테지- 가면은 칼부림 도중 땅에 추락했다. 자, 얼마만인가? 살아 있는 객체로서 그에게 정제 없는 감정을 보이는 것이. 박준태의 얼굴은 조직 하나하나가 혐오로 가득 차,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박준태가 모르는 새, 그간 참 얼마나 많이, 이리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왔을까. 이것은 명백한 기만이다. 당장이라도 짓밟고 싶지만 섬찟해 다가가지도 못하고, 겨우 이어지는 말을 듣는다.

 

“후회할 짓을 왜 하는 거니?”

 

답하지 않으면, 생명이 다 잦아든 줄 알았던 엘리자베스의 얼굴 - 에 속하는 껍데기 - 가 급작스레 말려 들어간다. 꼭 웃는 얼굴을 그리는 것처럼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가 있다. 박준태가 침도 삼키지 못하고 그 광경을 응시하면,

 

“저녁엔 파티라도 같이 하려 했는데…,”

 

내가 만든 클럽 샌드위치, 맛이 참 좋은데, 참, 왜 하필 이런 날에… 몇 마디를 더 주억거리다가 이내 고꾸라진다. 검은 선혈이 박준태의 발을 휘감듯 빠른 속도로 흩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 작은 미동도 하지 않자, 

 

그제야 박준태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후,

우.

 

시시각각 예민해진 박준태의 감각은 그를 역겹게 했으나 둔화된 현실 감각은 그의 복수를 마저 거행하게 해주었다. 재빨리 샌드위치 가게의 셔터를 내리고 잠근 뒤, 벌레들이 가득 들어 있는 자루에 손을 뻗었다. 결심과는 달리 손짓은 서툴고 투박해 자루의 입구를 제대로 짚어내는 데에는 꽤 많은 초가 소비됐다. 마침내 박준태는 걷어차듯 자루를 뉘이는데 성공했으며 엘리자베스의 소유에서 해방된 각자의 개체들은 재빨리 각자의 방향으로 향하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화를 발견한 관광객들처럼 악취를 풍기는 엘리자베스의 몸뚱아리로 향했다. 발, 발, 발. 스멀거리는 검고 반짝이는 것들의 응집, 이들 하나하나가 생명과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박준태는 그들 뭉치를 지켜보기 힘들어졌지만 집요하리만치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것들은 엘리자베스의 사체를 포위하고, 오르고, 분수의 흔적에서 버둥거리기도 했으나, 결국 그의 살점들을 오리고 자르고 작게 씹어 제 등허리들에 들쳐메기 시작했다. 박준태는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고스란히. 몇몇 벌레들은 그런 박준태의 신발을 타고 너머로 걸어가기도 했다. 유독 몸이 두터운 개체 하나는 버둥거리며 박준태의 신발코에서 유독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흐르는 검은 강을 넘고, 쇠가죽 운동화 언덕을 넘어서는 용맹한 전사들이여. 네들에게 하잘 것 없다는 평은 단연 옳지 못하다. 리지, 세상에 당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수 많은 것들의 존재 의의가 강등된다면, 역시 당신은 없는 편이 옳지 않나.

 

마침내 박준태는 헛구역질을 하며 현장을 빠져나온다. 하잘것 없음들이 마무리하는 ‘ ‘ 의 죽음은 제대로 하잘 것이 없었다. 

---

그 날, 박준태는 가게에 휴무 표지를 달았다. 이것은 아마 엘리자베스가 자주 해내왔던 것.

---

저녁 내내에는 짐정리를 했다.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서. 이것도 여태껏 엘리자베스의 몫 이었을 테지만.

도둑 맞은 날들이 참 길었다. 그를 죽여 봐야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이 통탄스럽다. 

---

할로윈이 끝나는 시각, 박준태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되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선명해지는 것이 많아, 박준태는 탄식했다. 

---

11월 1일, 박준태는 종일 방안에 앉아 있었다. 손톱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눈 앞에는 기어다니는 하잘것 없는 것들이 자꾸만 연상됐다. 그리고, 제 앞에서 거뭇거리며 흐르던 덩어리 진 액체들과, 종래에 보이던 검은 혓바닥이 늘어지는 것…

---

11월 2일, 박준태는 그큼이나 늘어져 하루를 보냈다. 잔뜩 늘어져 있던 그것의 형상이 정확히 연상되지 않는다. 돌기가 나 있었나, 그렇다면 그것은 문어의 흡착판처럼 제 몸에 들러 붙을 수 있나. 제 몸에 이미 틈 없이 가득 한 것 같아, 모공 하나도 제대로 된 숨을 연쇄할 수 없다. 

---

11월 3일, 그리고는 마침내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허기가 졌기 때문이다. 집 안에는 샌드위치 밖에 없었고,

엘리자베스는 샌드위치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적어도 오늘은 그 사실이 유감스러웠다.

멀쩡한 낯으로 나가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어, 가면의 끈은 대충 테이프로 이어 붙였다. 본능적이었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현장에서 가면을 챙겨온 기억이 없는데 요상한 노릇이다. 발이라도 달려 스스로 되돌아 오기라도 한 것인지.

---

거리는 한산했다. 드문 드문 나는 기억으로, 여태 세계 여러 곳을 돌며 장사를 해 왔지만, 엘리자베스는 항상 이런 인적이 드문 곳을 고집했다. 이따금 소란스러운 곳은 개미굴이나 쓰레기통처럼, 사람 뿐만이 아니라 악취도 낭자하는 곳이었다. TRASH IN TRASHCAN(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오물로 뒤덮혀 글자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 표지판은 소굴의 입구들마다 놓여, 지옥을 규격화했다. 다만, 오늘 주어진 거리는 난해하지도 난잡하지도 않다. 

온통 여백이 가득한 도로. 작은 음성으로 말해도 메아리가 울리는 바람과 낙엽이 시야의 전부를 사로잡는 거리에서 박준태는…

새삼스레 제가 착용하고 있는 상의를 확인하려 고갤 숙인다. 진작 갈아 입어 깔끔한 옷에는 분명 피비린내가 날 리 만무한데, 단풍잎이 차라리 슬럼가의 마약쟁이들이었다면. 술에 취해 껄떡대는 거렁뱅이들이었다면. 노래 부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남지 않은 늙은 마담이었더라면. 

 

제 악취는 티가 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킁, 한 번 더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

쇼핑은 짧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메뉴를 해 먹을 자신도 없었다. 간단한 요깃거리 정도를 짚이는 대로 계산하고 가게를 벗어나는데, 담배를 태우고 있는 5, 60대로 보이는 남성 둘이 박준태에게 손을 흔들었다. 박준태는 에먼 사람의 시비인줄 알고 무시하려 했으나, 그들은 지독했다. 박준태가 알아볼 때까지 팔을 혹사할 모양이었다. 서로에게 껄껄거리는 노인들의 웃음이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급격히 떨어지는 일조량 탓인가, 다가서자 그들은 의외로 아는 척을 한다.

 

“가게는 다시 안 하나? 거기 샌드위치만 먹으면 기분이 참 좋아졌는데 말이지.”

“향도 좋고, 씹히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자꾸 손이 간다니까.”

 

벌레, 마약, 중독 돼서 모르시는 겁니다. 한 마디 대꾸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정신조차 없다. 그러자 노인 하나가 팔을 들어 박준태의 어깨를 두드린다. 누가 보면 친밀한 사이인 줄 알겠다. 박준태의 기억상으로는 명백한 초면인데 말이다. 

 

“항상 그 양반 옆에서 이렇게 멀건히 서 있기만 하길래, 궁금했지. 이런 데도 돌아다니는구먼.”

“심부름 온 거 아냐?”

“...조셉.”

 

늙은이의 이름인 듯하다.

 

“...아, 그렇지. 미안하네. 늙으니 머리가 안 좋아져. …안 그래도 이따 둘이서 들러 꽃이라도 놓으러 가기로 했으니 용서하길 바라네.”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하는 노인들에게 무슨 소리냐며 묻자, 아, 그 주인장 말이야. 하고 답한다. 심장 마비로 갑자기 쓰러졌다며, 이상하네, 백날 천날 웃는 가면만 쓰고 있던데 사실은 건강이 좋지 않던 모양이지, 의뭉스러운 답을 한다.

자신이 만든 살해 현장은 참혹했고, 한 두 사람이 치운다고 수복될 일도 아니었다. 충동적인 살인이었으니 지문이나 증거 따위 쉽게 잡아낼 수 있었을 테고, 애초에 용의선상에 특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외에 없지 않나.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이리 행정 처리가 엉망일 리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꽃을 어디 말입니까?”

“저기, 공원 뒤편의 공동묘지 있잖아. 오늘 오전에 자리가 마련됐다던데. 그 사장, 젊은 사람 같은데 참 안타까워.”

 

실제로 엘리자베스의 나이는 박준태도 가늠할 수 없었으나, 그가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것은 분명했다. 껌뻑 속으셨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정신 병자 취급이나 당하겠지. 하지만 저 노인네들도 영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 걸. 누군가 죽었는데 여전히 흥분되고 신난 듯 격양된 표정만을 유지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섭취해 온 마약 성분 탓이 분명하다. 나 참,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세상이구만. 최소한 엘리자베스가 제게 준 세상은 그랬다. 그래서,

 

인사도 않고 휙, 뒤를 돈 박준태는 품에 든 식료품 가게의 봉지를 한 번 더 세게 끌어안은 채 묵던 곳으로 향한다. 

 

“저, 봐라 저거.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지.”

“냅 둬. 애초에 자기 주인 말고는 대답도 안 하던데.”

 

궁시렁대는 노인들의 말은 꼭 저를 리지의 개로 자리매김 하는 것 같다! 반발심이 들지만, 소란 피울 생각 없다. 어렴풋이, 엘리자베스가 자신에게 ‘행복하냐’고 자주 물어 왔던 것이 생각난다. 자동응답을 설정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은 분명 언제나 행복하다고, 행복하다고, 행복하다고. 그렇게 누차 말해 왔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믿었을까? 진위성 따위 상관 없었겠지. 자신은 언제나 그 때문에 불행했다. 나도 내 의지로 삶을 준 것이 아니야, 탈환 당한 것이란 말이야. 

 

가는 길, 온갖 식물이 생명을 달리하는 죽음의 계절 가을에도 이름 모를 들꽃 하나가 있다. 문득 꺾는다. 

 

아,

그 새 또 죽였구나. 하잘 것 없음들을 대변해 주려 했는데.

박준태는 걸음을 더 빠르게 재촉한다.

 

---

 

가는 길, 기관에서 시체에 대해 물었지만 아는 관계자가 없다. 작은 마을이니 사망자가 나왔다면 분명 모두 알고 있을 텐데, 관련해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주민 중에 박준태, 라는 사람이 있냐고도 묻자 조회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름조차 아연한 시골이니, 이주 신청을 안 했을 지도 몰라…,, 애쓰며 누차 물었지만 명쾌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최후의 질문에만 제대로 된 답을 내 주었다.

 

네, 실종이 오래 되면 공통적으로 사망 처리를 하기는 합니다. 

아무튼 저희 쪽에서는 그 이름이 조회가 되지는 않네요. 

다른 주에서 실종 기록이라도 찾아 드릴까요?

그 정도라면 아마 사망자로 처리됐을 거예요.

---

요기를 떼우는 것도 쉽게 되지 않았다. 흡혈을 해 본적은 없으나 버섯은 꼭 선지를 씹는 것처럼 물컹거렸고 질퍽거리며 이상한 향을 내서, 박준태는 몇 입 먹지도 못하고 식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꺾어온 꽃은 탁자에 둔 채로, 그는 다시 길목에 나선다. 무의식적으로 꽃을 꺾어낸 자신의 행위에 이유를 붙여주려 애쓴다. 철저한 이방인인 손님 할아버지들도 꽃을 챙겨간다고 했기에 보는 눈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라고, 이만 결론내리고 싶은데, 도저히 답이 아닌 것 같아 그럴 수가 없다,

 

제 자신마저 명쾌하지 못한 채 공동묘지를 향해 서성인다. 이 곳에서 자신의 얼굴은 가면이었으니, 아까 본 노인들처럼 몇몇이 가면 쓴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해 온다. 가게 밖에선 처음 본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 그거 벗겨봐도 돼요? 보드를 옆구리에 낀 채 개구진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물어 오는 꼬마, 박준태는 가면을 뻣뻣히 쓴 채로 내려다보다가 대꾸도 않고 앞서 간다. 그러다 휙, 뒤를 돌아, 

 

“되겠냐고. 바보”

 

하고 웃는 소리를 낸다. 제가 들어도 거칠고, 부자연스럽고, 높낮이가 불규칙적이다. 예전엔 이렇게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 꼬마는 두려움을 느낀 모양인지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하고, 박준태는 한참 더 웃는 소리를 내다가 일순 침묵한다.

---

 

공동묘지는 제법 규모가 컸다. 발전하지 못한 동네라, 오랜 시간동안 한 곳에 자리하며 자연사한 노인들을 한 데에 모두 모아놓은 듯했다. 거주자들도 별로 없어, 무덤도 모두 엇비슷하게 휑했으므로 엘리자베스의 것을 찾아내는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지난 시간 제 삶의 신처럼 군림한 것이 괘씸하니, 박준태는 무덤에 불을 지르거나 파헤치거나 발길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죽은 이후에도 엘리자베스는 어쩐지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그가 이리 허무하게 죽은 것도 이제 와서야 이상하다.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버텨낼 수 있는 우리 외의 존재 아니던가?

 

무덤을 깔고 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박준태는 제가 썼던 가면을 아무렇게나 무덤 옆에 던져둔 채, 옆에 털썩 앉아 한 팔을 그 위에 올린다. 예로부터 11월은 망자들이 돌아오는 날이라고 하던데, 이 공동묘지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저 자신밖에 없다. 대면을 방해할 개미 한 마리 조차 존재하지를 않아서, 박준태는 불가항력으로 회상을 시작한다.

 

기억은 누군가가 오려낸 것처럼, 맞지 않는 퍼즐처럼 욱여져, 도대체 앞 뒤를 이을 수도 없다. 분명 제게 접근해 온 마약상 엘리자베스에게 대충 받아낼 수 있는 것만 해내고 손절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영문을 모르는 사이 자신은 식물인간이나 다름 없이 껍데기만 남아 그에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순순히 곁을 지켜 오고 있었다.

 

세상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애완 인간이란 말은 없다.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의 존재는 있어서는 안 된다. 꼭 이스터에그와도 같은 존재, 엘리자베스는 그의 이성을 송두리째로 집어삼켰다. 마침내 그를 죽였지만, 어딜 가나 자신을 기억하는 기억 외의 존재들은 엘리자베스의 하수인 정도로 자신을 여긴다. 언제나 행적을 감추고, 새로운 자리를 포섭해 박준태를 데려가던 것도 엘리자베스였다. 주도권을 한 존재에게 위탁했으니, 박준태는 새삼 미아가 된 것만 같다. 

 

아, 리지. 없는 존재가 묘지에 묻힐 수는 있는 것인가? 엘리자베스가 백 날 인간의 형태를 흉내냈다 한들, 마주친 적 없는 본연의 모습이 분명 존재했던, 것, 같은데… 아, 검다. 검은 것, 온통 검은 것만이,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는 어느 목격담이.

 

짐가방은 준비되었다. 그러나 명목 상의 보호자는 여기 차게 식은 땅 밑에 묻혀 있다. 지난 날의 장엄한 위엄 따위 하나도 없는, 하잘 것 없는 평지로 이렇게 자리했다. 성급한 살해였나? 박준태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고국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를 처음 만났던 곳은 미국의 슬럼가, 당연히 홀몸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 미래를 위해 그를 죽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미래조차 죽여 버린 꼴이 되었다. 그 외의 곳에서는… 자신은 엄연한 망자로 처리가 되었지 않나. 신원조차 불분명한 사람을 누가 쓴다고?

 

박준태는 일순 가장 두렵고도 끔찍한 사실을 직시한다. 깨달아 버린 것이다. 오로지 엘리자베스만이 그의 목숨을 입증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죽은 이상, 박준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망자 처리가 된, 명백한 죽은 이에 지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박준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한기가 서렸다. 바람은 불지 않았는데도.

 

박준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잔디를 쥐어 뜯는 꼴이 되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고일 틈도 없이, 주룩 내리기 시작한 그것은 금세 윗입술에 닿아 그의 설움을 해방시켰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나. 내 손으로 죽인 것은 꼭 나와 같다.

 

엘리자베스가 있었던 이상 그는 강제적으로 무엇도 슬프지 않았고 즐거웠다. 작은 유희와 갈피조차 없는 이 삶은 더 어떻게 연명해야 하는가? 이 무의미와 무효와 무참함의 연속에서, …

 

엉, 엉. 박준태는 오열하기 시작한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은 마르지 않고 솟구친다. 볼 사람도 없고, 공기마저 싸늘하게 식은 공간에서, 박준태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틈엔가 심취했던 것도 같다. 무엇의 힘겨운 등산을 목도하는데에 걸린 시간은 한참이었다.

손에 무엇인가 간질이는 것이 느껴져,

 겨우 살펴보니 손에는 새까만 벌레 한 마리가 기어 오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본 것과 같았다.

환영인가? 그러나 이 감촉은 진실하다. 제 신발 코를 넘어서던 발버둥처럼, 엘리자베스의 칼날에서 허우적거리던 요동침처럼. 보기 흉측할 정도로 생동감 있게 제 활기를 자랑하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생명이 거북스러워, 박준태는 이를 털어내려고 했으나, 

 

순

    식   간에 더 많

은 벌레 여러 마

    리가 제 손목을 휘

감고, 손가락 사이

 를 기  어   오

             르고, 손가락 마디를 쓸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까지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박준태는 급작스레 시작된 이들 행렬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일순 유독 몸짓이 거대한 한 마리를 제한 모두가 알아서 

 

흩어

졌다. 

 

남은 한 개체는 박준태의 팔을 느릿하게 

기

어

가

기 시작했다. 다른 개체들과는 다르게, 등빤지에 일말의 윤기도 돌지 않는 것이, 미미하게 드는 햇빛마저 저가 다 흡수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느 새 우는 것도 잊고, 가만 이를 응시하고 있자, 

벌레는 기어다닐 때마다 새까만 점액질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는 곧 문자가 되었고, 단어를 이루더니, 종국에는 문장이 되었다.

 

‘준’

‘태’

‘야’

 

“준태야.”

 

‘그러게’

 

‘왜’

 

‘후회할 짓을’

 

‘하는 거니?’

 

“그러게…왜, 후회할 짓을.”

 

박준태는 더듬거리며 내키지 않는 문자들을 읽어낸다.

 

스멀거리며 어느새 박준태의 안면에까지 이른 벌레는, 그의 왼 눈가에 앉더니, 한동안 그 곳에 머물렀다. 

머물고, 또 머물렀다. 

 

그리곤 마침내 천천히 입술로 내려왔다. 

이를 어루만지듯 조금씩 다리를 꿈틀거렸다.

박준태는 ‘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움직여 이의 등허리에 가벼이 마찰시켰다.

이것을 입맞춤이라 부를 수 있나?

 

끓는 눈물 탓에 눈을 감았다 뜨면, 벌레의 형체는 이미 없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

아니, 자신의 가면을 쓰고 있는 한 실루엣.

너무나도 낯익고, 섬찟하고, 소름 끼치는 그것이다.

 

이곳은 집이 아니다.

 

이 실루엣의 정체를 박준태는 영영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준태는 일순 ‘의식적으로’ 그를 강하게 그것을 껴안는다.

망자가 돌아오는 11월의 첫 날, 그 후로도 꼬박 사흘이 지나서야,

짖궂은 신은 눈속임을 관두고 자신의 부속물에게 돌아왔다.

 

한 차례도 죽은 적 없는 리지.

그는 박준태의 생존을 입증해 줄 유일한 존재.

리지의 눈부신 환생으로, 할로윈의 영험한 저주는 두 사람을 환생시켰다.

집이 아닌, 

“널 조금 더 소중히 생각하기로 했단다. 생각보다도 귀여워서 말이지.”

 

한 순간,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이 박준태의 입술 모두를 포획한다. 

 

“행복하니?”

 

그러면 박준태의 답은,

 

“...행복…”

 

무덤이다.

 

“합니다.”

 

오늘 만큼은 안식이 아닌, 

 

10월 31일은 어쩌면 11월의 저주를 방지하기 위해 탄생한 날이다. 현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티를 보낼 수 있는 기념일로 삼게 되었지만, 엘리자베스를 만난 이후 언제나 저주스러운 삶을 보냈던 박준태에게는 어김 없이 저주가 내려졌다. 

 

안도를 제공하는,

짧은 입맞춤, 박준태는 뿌리치지 않는다.

 

무덤이다.

 

샌드위치 가게는 보름 후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개업을 시작했다.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를 조리해 판다. 이것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진다. 

누구나, 정말 누구나. 

 

하지만 가끔 두 가면을 쓴 종업원 중 모자를 쓰지 않은 쪽은 불규칙적으로 웃는데 이것은 흐느낌 소리를 닮았다.

 

두 사람의 거처에는 식탁에 시들어버린 흰 들꽃이 꽂힌 꽃병이 자리해 있다. 

 

숨이 제법 질기다.

-끝-

---

10월 초, 작업을 시작하며 무덤이란 소재를 할로윈과 이어 보려고 노력했어요. 둘의 설정과 오리지널 이야기가 둘 다 좋아서, (전) 준태와 (현) 준태 모두를 등장시키고 싶어 고민하다가, (전) 준태가 현재를 목도하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게 되었습니다. 커미션주로서 인외의 존재를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요?! 둘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고, 어쩌면 세팅이 끝나 있는 설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드릴까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해서 제가 해석한 관계의 모습이 그려진 것 같은데 어떻게 마음에 드실 지 모르겠네요…

제목인 충신은 중의적인 의미로 작명해 보았어요. 

1. 엘리자베스에게 충성하는 (현) 자아 없는 준태 忠臣
2. 벌레(蟲) 의 형태를 띄고 있는 나의 신 

2-1) 마지막에서 준태는 자신의 의지로 엘리자베스 곁에 남기로 하고, 엘리자베스는 준태가 자신에게 ‘하잘것 없는 존재’ 이상임을 깨달아요. 해서 엘리자베스에게도 준태가 유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작중에서 준태는 ‘벌레’와 ‘준태’를 동일시해요. 해서 蟲신은 준태에게 엘리자베스로도, 엘리자베스에게 준태로도 작용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